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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선량(善良)한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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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善良)한 청지기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누가 16:2, 공동번역)



1.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피조물이 그 창조자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죄인, 타락한 피조물로 생각될 경우에는 인간은 창조자에 대한 채무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가끔 종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겸비의 상태에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을”(빌립보 2:7) 때 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호칭입니다.


2. 그러나 청지기라는 특징이야말로 오늘날의 인간의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간이 채무자 또는 종으로 불리우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 그가 종으로 불리울 때 그 ‘종’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이요 막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하나의 특정한 종류의 종입니다.(성경에서 나오는 청지기는 ‘종’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점에서 각각 그런 것입니다. 이 ‘청지기’라는 호칭은 오늘의 세계에서의 인간의 상황을,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종류의 종이며 또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어떤 종류의 봉사를 기대하고 계신가를 명확하게 기록하여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점을 철저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이 점을 충분히 이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제 하나님의 청지기인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요구하실 때에는 우리는 “이미 청지기일 수 없다”(누가16:2)는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고 셋째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다만 “우리의 회계보고를 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Ⅰ. 우리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청지기인가?


1. 그래서 첫째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이제 하나님의 청지기인가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채무자는 받은 것을 돌려줘야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돌려줄 때가 오기까지는 그는 자기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것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청지기는 수중에 맡겨져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용해서는 안되고 주인의 생각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것들 중의 아무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요 다만 다른 이에 의하여 맡겨지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그것들을 주인이 명하는 대로 모든 것을 처분하기로 하는 분명한 조건으로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중에 맡기신 것을 우리들이 좋아하는 대로 마음대로 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홀로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 이외에는 우리가 가진 것을 처분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것들은 모두가 ἁλλὀτρια, 즉 다른 사람에게 속해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순례의 땅에서는 아무것도 정당하게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일컬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라(천국 또는 지옥 - 편집자 주)에 가기까지 Τἁ ἴδια 즉 우리 자신의 것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만이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 세상의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단지 다른 이에 의하여, 모든 것의 처리자이시고 주인 되신 분에 의하여 맡겨져 있는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주는 다음의 명백한 조건 아래 그것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주의 소유물로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또 주께서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특정한 지시를 따라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2. 이 조건 밑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 육체, 재산, 그리고 우리가 받은 다른 여러 가지 재능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우리 마음에 명심하기 위해서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 영혼을 맡기셨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불사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영혼이 지니는 모든 능력과 기능, 이해력, 상상력, 기억력, 의지, 그리고 일련의 감정 - 이것들은 영혼에 포함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적으로 거기 의존되어 있거나 한 것이지만 - 은 이 맡기심 안에 들어있습니다. 현재의 선악에 관해서의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장차 올 사항에 관한 욕망과 혐오, 희망과 두려움도 이 맡기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평안이 ... 여러분의 심정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빌립보 4:7)라고 말할 때에 그 ‘심정과 생각’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하여 능동적이거나 피동적이거나 정신의 모든 지각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3. 이제 확실히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의 단순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힘과 기능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자신의 뜻을 따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지시를 따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 상상력, 기억력을 철두철미하게 그런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뜻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우리의 감정은 모조리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규정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 모든 사항에서 우리가 누구를 섬겨야 할 것인가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원하고 기피하며 바라고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 마음대로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 마음의 하나하나의 신중한 동기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크신 주께 책임을 맡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몸을 맡기셨다.

4.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을 그 모든 힘과 지체와 함께 맡겨주셨습니다. (몸은 정교하게 만드신 기계로서 참으로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편 139:14 참조>) 하나님은 감각의 모든 기관, 곧 보고 듣고 하는 기관과 그 밖의 기관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용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어느 것도 어느 기간 동안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대여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바로 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용해선 안됩니다.


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의 능력이라는 그 가장 우수한 재능을 부여해 주신 것도 동일한 조건에서입니다. 옛날의 저작자도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그것으로 찬미하기 위하여 당신은 나에게 혀를 주셨습니다.”(이하는 어거스틴의 참회록에서의 인용입니다) 그것은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사용되기 위해 모든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는 자신의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은혜를 잊은 자, 우스운 자가 또 달리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만들고 따라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자가 아닌 한, 그러한 웃을만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는 주시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시편 100:3).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이 역시 우리를 지배하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혀의 말로써 우리가 하나님에게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6.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의 사용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맡겨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버지에 의하여 정해진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신뢰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많은 달란트들입니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도 좋지만 그것은 청지기로서 사용하는 것이지 소유자로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체를 죄에 내어 주어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온 몸이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로마서 6:13) 것을 목적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3) 재물을 맡기셨다.

7.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재물을 분배해 주시고 그것을 맡기셨습니다. 먹을 음식, 입을 의복, 머리를 눕힐 장소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생활의 필수품만 아니라 편리품도 맡기셨습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저 귀중한 달란트인 돈을 우리가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돈은 실로 말할 수 없이 귀중합니다. 다만 우리가 돈에 대해서 현명하고 충실한 청지기요 또 우리의 복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그 목적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4) 능력을 맡기셨다.

8. 넷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확하게는 이러한 항목의 어느 것에도 들지 않는 얼마간의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체력이라든가, 건강이라든가, 좋은 인상이라든가, 잘 순응하는 태도라든가 하는 그런 것입니다.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학식이나 지식, 또는 그 밖의 교육에서 온 갖가지의 경험도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그런 것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사랑과 존경에 의해서든가 혹은 힘에 의해서든가로 되는 것입니다. 힘이라고 말한 것은 생활환경 속에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거나 해를 주거나 하는 힘,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거나 하는 힘입니다.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매순간 우리에게 맡기신 저 시간이라는 매우 귀중한 달란트를 첨가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기에다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하고 있는 것, 그것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축복이 아니요 저주가 돼버린다는 것을 첨가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든 사항을 만드는 것입니다.


Ⅱ. 죽으면 우리는 이미 청지기일 수 없다.


1. 매우 많은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은 천지의 소유자이신 주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재산의 대단히 많은 부분, 더구나 여러 가지 종류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리 아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히 우리의 것도 아니며 사실상 긴 시간 동안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짧은 기간동안 그것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 덧없는 호흡이 콧구멍을 통하고 있는 동안의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부터 네게 관리인 직분을 맡길 수 없다”(누가복음 16:2) 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 눈앞에 신속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몸이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전도 12:7) 그 순간에 우리는 이미 그 직분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가 청지기일 때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맡겨져 있던 그 모든 재산의 역할은 이미 종말에 온 것입니다. 그것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관해서는 그렇게 됩니다. 또 우리는 그 이상 그것들을 맡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기고 간 부분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으며 이용될 수도 없습니다.


1) 몸과 재물과 능력은 끝이 난다.

2. 전에 우리에게 맡겨졌던 것의 역할은 적어도 우리에게 관해서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생명 이후에 음식물이나 의복이나 주택이나 이 세상의 재물들과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죽은 자의 음식은 땅의 흙이요 그들은 단지 버러지와 부패를 입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모든 육체를 위하여 마련된 집에서 삽니다. 그들의 나라는 이미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이 세상의 재산은 모두 다른 이의 손에 넘겨져서 그들은 “해 아래에 행하는 모든 일에 다시는 분복이 없습니다”(전도서 9:6)


3. 사정은 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이 기계의 청지기는 아니게 됩니다. 그 때에 몸은 부패와 치욕 속에 흩어집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었던 모든 부분과 요소는 진흙 속에 뉘어져 썩어집니다. 손은 이미 움직일 힘을 잃고 발은 그 기능을 잊었습니다. 살과 근육과 뼈도 모두 흔한 흙으로 해체되기를 재촉당하는 것입니다.


4. 또 여기 여러 가지 성질의 달란트도 끝납니다. 즉 우리의 체력, 건강, 아름다움, 웅변, 말솜씨, 남을 즐겁게 하거나 설복시키거나 납득시키거나 하는 능력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우리가 일찍 향유하였던 모든 명예, 우리 손에 쥐어졌던 모든 권력, 남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품고 있던 사랑 혹은 존경에 의하여 우리가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가졌던 모든 영향력이 끝납니다. 우리의 사랑, 미움, 욕망도 사라집니다. 아무도 우리가 일찍이 그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던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자기들을 도우지도 해치지도 못하는 자로 봅니다. 따라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도서 9:4)


2) 지식과 지각과 이해력과 감정은 남는다.

5. 우리가 현재 맡고 있는 달란트 가운데 어떤 것에 관해서는 몸이 흙으로 돌아갈 때 그것들은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런지도 모릅니다. 죽음으로서 우리 몸의 기관이 사라질 때에 그 능력은 전적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확실히 혀는 이미 아무 진동도 공중에 일으키지 못하며 또 귀도 이러한 진동을 공통의 감각중추기관에 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몸을 떠난 영들도 서로 마음을 교통하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혈육을 가지고 살고 있는 어떤 생물이 그 방법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간주 될 때에는 이미 이 달란트(우리의 언어 )의 청지기는 될 수 없습니다.


6.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모든 기관이 소멸된 때에 우리의 감각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어떤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적 낮은 종류의 감각 - 촉각, 후각, 미각 - 이 없어지는 것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몸에 대하여 일층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또 전면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로 몸의 보전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시력은 눈이 죽음으로 인하여 닫혀진다 해도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의 청각과 같은 것이 혼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뿐 아니라 혼이 몸에서 떠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이 단순히 존재할 뿐 아니라 현재보다도 훨씬 뛰어난 정도로, 한층 더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는 혼은 그 흙이 되는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미 “흐린 곳에서의 죽어가고 있는 불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때에는 혼은 이미 “눈과 귀라는 창을 통해서 보지”않고(이상의 두 인용문은 Sir John Davie 의 Nosec Teipsum에서 인용) 우리가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혼 자체가 모두 눈이요, 귀요, 감각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의 가능성, 눈을 사용하지 않고 보며 귀를 사용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분명한 증거를, 아니 그뿐 아니라 그 사실의 전조(前兆)를 끊임없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혼은 눈이 전혀 쓸모가 없을 때에, 즉 꿈 속에서 매우 분명한 방식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혼은 귀로부터의 아무 도움이 없이도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이 어떠할 것인가 하는 명확한 사실은 몸이 정적의 무덤 속에 누울 때에 우리의 감각도 우리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7. 우리가 교육에 의하여 얻은 지식이나 학식이 그 때에 얼마만큼 남을까는 우리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10) 그러나 이러한 말이 절대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버린 후에는 지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에서 매우 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의문은 반대쪽에서 일어납니다. 죽을 때까지는 참 지식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다음의 인용에 나타나 있는 것은 단순한 시적 상상이 아니요 분명한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 그림자들은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가 만드는

공허한 꿈에 불과하다

(Abrahan Cowley의 Life에서 인용)


물론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자진해서 계시하신 사항은 유일한 예외이기는 합니다. 체험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말합니다. 어느만큼의 근면성을 가지고 약 50년 동안 진리를 추구해온 뒤에 나는 오늘에도 성서에서 배운 사항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적극적으로 단언합니다. 나는 다른 아무 것도 성서에서 배운 것만큼 확실하게 알지 못하므로 감히 나의 구원을 거기(성서)에 걸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말에서 “음부에는” 불우한 영에게 조금도 유용한 “지식도 지혜도 없다”(전도서 9:10)는 정도의 사실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음부에는 그가 일찍이 맡았던 여러 가지 달란트를 그때가 되어 활용하려고 생각해도 그것을 위한 “계획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결정하는 우리의 시련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광대하고 불변하는 영원의 길잡이가 되는 “주의 날”(데살로니가후서 5:2)이 지금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3) 영혼은 끝나지 않는다.

8.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의 혼은 부패하지 않으며 불멸하며 “천사들보다 조금 낮은”(히브리서 2:7) 성질의 것입니다. (이 성구를 우리의 타락 이전의 본성의 의미로 이해한다 해도 같은 것이 됩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혼은 몸이 썩어 흙이 될 때에도 그 기능을 모두 갖춘 채로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력과 이해력은 육체의 소멸로써 소멸되거나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상상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다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현재 혼과 부패하는 육체와의 결합을 위하여 당연히 생겨나고 있는 결함으로부터 그 때에는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혼과 육체가 분리한 때로부터는 우리의 기억은 아무것도 떨어져 나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기억은 일찍이 거기에 맡겨졌던 모든 것을 충실히 우리의 시야에 전시할 것입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성서에서 “잊음의 땅”(시편 88:12)으로 불리워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옛 번역으로는 그 이상 강한 표현으로 “모든 것이 잊혀진 나라”로 호칭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잊혀진다고 하지만 대체 누구에 의해서 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잊음의 땅”입니다. 잊음의 땅의 모든 사항은 너무도 가끔 이 땅 위의 주민들에 의하여 잊혀져 버립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이탈된 영들에 의하여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땅 위의 임시 숙소인 육체를 벗어난 때로부터 그들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9. 마찬가지로 의심할 바 없이 이해력도 현재는 거기에 붙어 있는 결함(=오류)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서 "Humanum est erraeet nescire" 즉 무지와 오류는 인간성에 부착된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장 전체는 단지 살아있는 인간들에 관해서 참일 뿐이요 “부패하는 육체가 혼을 압박하고 있는”(솔로몬에 지혜서 9:15) 동안 이상으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무지는 확실히 모든 유일한 이해력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항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달리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나 오류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가 버려질 때 이 ‘오류’ 또한 영구히 버려집니다.


10. 그러면 우리는 근자에 하나의 의견을 발표한 한 독창적 인물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인물에 의하면 육체를 떠난 영은 단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요(보거나 듣거나 하지 못할 뿐 아니요) 기억력도 이해력도 사고도 식별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까지도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부활까지 죽음의 잠 속에 있습니다. 실로 Consanguineus lethi sopor입니다. (죽음과 흡사한 잠이라는 뜻). 이러한 잠을 우리는 그것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죽음에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발견을 한 사람처럼) 독창적인 사람들은 기묘한 꿈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외에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꿈을 현실로 잘못 생각하는 수가 가끔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망상일 뿐입니다.)


11. 그러나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육체의 사멸에도 불고하고 혼이 그 이해력과 기억력을 보유하는 것처럼 틀림없이 의지도 모든 감정을 포함하여 그 충분한 활동력 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나 분노, 희망이나 욕망이 소멸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뒤에 남겨둔 사람들에게만 관계됩니다. 뒤에 남기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우리의 애정과 증오, 욕망이나 혐오의 대상이었든지 어쨌든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있어서 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도 소멸해 버린다고 우리가 믿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더욱이 혼이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던 때보다도 의지와 감정은 훨씬 큰 힘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4) 그러나 더 이상 청지기 자격이 없다.

12. 확실히 이 모두 우리의 지식과 지각, 기억력과 이해력, 또 우리의 의지, 사랑, 미움, 그리고 모든 감정은 육체가 버려진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러나 (육체가 버려진 후에는) 다음의 점에서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그것들의 청지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만 우리의 청지기의 임무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자격에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충실하고 현명한 청지기일 수 있기 위하여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은혜까지도 이제는 이미 그 목적을 위하여 맡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지기의 직무에 있는 날들은 끝난 것입니다.


Ⅲ. 나에겐 회계보고를 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1. 이제 이미 청지기가 아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일은 우리가 회계보고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 즉시 우리가 영들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해야하는 일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로마교회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그 위에 이것을 신앙의 한 개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의 정도까지는 인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혼이 육체를 벗어나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서는 그 순간에 혹은 영원에 걸쳐서 자기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혼은 영원히 계속되는 즐거움인가 영원히 계속되는 괴로움인가 어느 쪽이건 그것을 완전히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판단에서 잘못 생각하는 일은 이미 우리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때에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믿을 이유를 성서는 조금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죽자 마자 심판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것 같은 구절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이 목적을 위해서 이야기 되어 온 것은 차라리 그 반대의 사정(죽자 마자 심판받는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즉 그것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히브리서 9:27) 것인데 이것이 반대쪽 사정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한 번”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만이 아니라 심판에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로 본문에서 끌어내지는 무리 없는 결론은 개별적인 심판과 일반 심판이라는 두 가지의 심판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단 한 번 죽는 것과 동시에 단 한 번 심판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후에 즉시 한 번 심판을 받고 일반적인 부활이 있은 후에 다시 심판 받는다는 것이 아니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는”(마태복음 16:27) 그 때에만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신앙의 전적인, 유일한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때에 하나의 심판이 있고 세상의 종말에 또 한 번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상상은 할 수 없습니다.


2. 따라서 우리가 이 회계보고를 해야만 하는 시기는 “하늘에서 크고 흰보좌가 내려오고 거기 앉아있는 분이 계시며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을 수 없게 될”(계시록 20:11) 그 때입니다. 그 때에는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그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책이 펴집니다”(계시록 20:12). 그것과 함께 맡겨졌던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서가, 전인류를 위해서는 양심의 책이 펼쳐집니다. (또 하나의 성서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기념책”(말라기 3:16) - 이것은 세상의 창세로부터 쭉 기록되어 온 것이지만 - 도 또 그 때 모든 사람의 자녀들에게 보이도록 펼쳐진 채로 놓여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인류 앞에, 무수한 거룩한 천사의 무리들 앞에 또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당신은 어떤 은신처도 덮개도 없이 아무 위장의 가능성도 없이 출두하게 될 것입니다. (출두한 이유는) 당신이 주의 재산을 사용한 방식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1) 영혼을 어떻게 썼는가?

3. 그 때에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네 혼을 어떻게 썼는가? 여러 가지 힘과 기능, 이해력과 상상력과 기억력과 의지, 감정을 부여받은 불사의 영을 나는 네게 맡겼다. 그 위에 나는 네게 이 모든 것들이 어떤 모양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충분한 그리고 명확한 지시를 주었다. 너는 자신의 이해력을 할 수 있는 대로 이러한 지시를 따라 사용했는가? 즉 네 자신과 나를 알기 위하여 사용했는가? 나의 본질, 나의 속성, 창조나 섭리나 은혜에 관한 나의 업적을 알려고 했는가? 너는 나의 말을 친숙하게 알기 위하여 자신의 이해력을 사용했는가? 나의 말에 대한 네 지식을 더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했는가? 나의 말에 대하여 밤낮으로 심사숙고하였는가? 너는 자신의 기억력을 나의 뜻을 따라서 사용했는가? 나의 영광이나 너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에 공헌하는 지식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취득하여 그것을 저축하였는가? 너는 네 기억 속에 가치가 없는 사항은 말고 네가 내 말에서 배운 모든 교훈, 네가 나의 지혜, 진리, 능력, 긍휼에 관해서 얻은 모든 체험을 축적했는가? 네 상상력은 쓸데없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물며 <어리석고도 해로운 여러 가지 욕심>(디모데 전서 6:9)을 육성하는 영상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요 네 혼을 유익하게 하며 너를 환기시켜 지혜와 깨끗함을 추구케 하는 사항을 모두 하나하나 네게 그려내기 위해 사용됐는가? 너는 자신의 의지에 관하여 나의 지시를 따랐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내게 바쳐졌는가? 네 의지는 나의 의지 가운데 삼켜져서 결코 나의 의지에 거스림이 없이 늘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정도였는가? 네 감정은 내가 나의 말 속에서 지정하고 있는 방식으로 배치되고 통제되어 있는가? 너는 마음을 내게 주었는가? 너는 이 세상도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않았는가? 내가 네 사랑의 대상이었는가? 네 욕망은 모두 내게로 또는 내 이름을 기념하는 쪽으로 향해져 있었는가? 나는 네 마음의 기쁨, 네 혼의 즐거움, 천만가지 중의 으뜸이었는가? 너는 내 영을 슬프게 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았는가? 너는 죄 이외의 것을 아무것도 무서워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않았는가? 네 감정의 흐름 전체는 원래의 근원인 큰 바다에로 흘러 들어갔는가? 네 생각은 나의 뜻을 따라 사용되었는가? 땅 끝까지 미친다든지 우행이나 죄를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모든 참된 것과 모든 옳은 것>(빌립보서 4:8)을 생각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가? 나의 영광 그리고 <사람들의 평화와 선의>(누가복음 2:14)로 인도하도록 하는 모든 사항을 생각하기 위해 사용되었는가?


2) 몸을 어떻게 썼는가?

4. 그리고는 주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네게 맡긴 육체를 너는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나는 네게 나를 찬미하기 위한 것으로 혀를 주었다. 너는 그것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였는가? 너는 그것을 욕을 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무자비한 말이나 무익한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선을 위해, 즉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하거나 유용한 방식으로 사용하였는가? 혀는 언제나 직접적으로 간접으로나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게>(에베소서 4:29)하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나는 네게 다른 지각과 함께 시력과 청력이라는, 지식에의 위대한 길을 주었다. 그것들은 네게 주어진 우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물론 그 목적이란 너를 더욱 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는 일이다. 나는 너를 위해 준비된 일을 네가 실행할 수 있도록 손과 발과 여러 기관을 주었다. 그것들은 <육신의 생각>(로마서 8:6), 네 악한 본성의 소원대로 행하거나(네 이성이나 공상이 너를 인도해 가는 사항인) 마음의 소원을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너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요한복음 4:34)을 이행하고 오직 너 자신의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었는가? 너는 자신의 기관을 모두 불의의 무기로 죄에 넘겨주는 일을 하지 않고 나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통하여 그것들을<의의 병기로>(로마 6:13) 나에게만 바쳐 주었는가?”


3) 재물을 어떻게 썼는가?

5. 만물의 주는 다음에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네 수중에 맡긴 이 세상의 소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너는 자신의 식물을 거기서 네 행복을 추구하거나 걸기 위해서가 아니요 혼에 합당한 도구로서의 육체를 건강하고 힘차게 활력에 찬 몸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였는가? 너는 의상을 교만이나 허영심을 찬 몸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였는가? 너는 의상을 교만이나 허영심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더구나 다른 사람들을 죄에 유혹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자신을 기후의 재해로부터 적절하게 또는 단정하게 지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너는 자신의 주택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편리한 것들을 나의 영광만을 목표로 하여 만들고 사용하였는가? 그 모든 점에서 너 자신의 명예가 아니요 나의 명예를 추구하며 너 자신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목적하고 있었는가. 되풀이가 되지만 너는 저 포괄적인 안목의 정욕이나 생활의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익한 비용으로 낭비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내게로 돌려져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받도록 정한 것이다. 너는 자신을 가난한 사람의 수호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네 수중에 네 재산의 일부를 맡겼는데 그 목적은 그들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품이 거기에서 공급되기 위함이었다. 네게는 첫째로 공급 받는다는 권리를, 또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의 축복을 맡긴 것이다. 그것을 따라서 너는 인류 전체에게 은혜를 베풀었는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위로하며 나그네된 자를 돌보고 고통하는 자를 그 여러 필요에 따라 구원했는가? 너는 소경에 대해서는 눈, 불구자에 대해서는 발, 아버지를 잃은 자에 대해서는 아버지, 과부에 대해서는 남편이었는가? 또 너는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는 수단으로서 모든 자비의 외적 활동을 증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가?”


4) 능력을 어떻게 썼는가?

6. 당신의 주는 다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네게 대여해 준 혼합된 성질의 달란트에 관하여 현명하고 충실한 청지기였는가? 너는 자신의 건강과 능력을 어리석은 행동이나 죄, 탐닉하고 있는 동안 소멸해 버리는 쾌락을 위해 쓰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쓰는>(로마서 13:14) 일에 쓰지 않고 네게서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저 보다 좋은 부분을 간절히 추구하기 위해 사용했는가? 너는 자신의 인품이나 태도에서 바람직한 것, 네가 교육에서 얻은 이익, 네게 맡겨진 지식의 분량, 사물이나 인간에 관한 지식을 이 세상의 미덕을 촉진 시키고 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는가? 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깃, 사람들이 마음에 품게 된 네게 대한 사랑이나 존경으로써 네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모두 사람들의 지혜와 거룩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사용했는가? 너는 시간이라는 비할 데 없는 귀한 달란트를 각 순간이 가진 가치를 바르게 계산하고 그 모든 순간들이 영원 속에서 계산된다는 것을 앎으로써 세심한 신중성을 가지고 사용하였는가? 더구나 너는 네게 선행하며 너와 동반하며 네 뒤를 따르는 내 은혜(=성령의 감화)의 좋은 청지기였는가? 너는 내 영의 모든 감화를, 즉 모든 좋은 욕망, 모든 정도의 빛, 하나님의 모든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비난을 바르게 간파하고 조심스럽게 활용하였는가? 너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 이전에 주어지는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영>(로마서 8:15)으로서 어떻게 이익을 얻었는가? 네가 마음 속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게 되었을 때에 내가 너를 자유케 한 그 빛나는 자유 안에 너는 계속 굳게 섰는가? 너는 그 때 이후로 네 영혼과 육체, 모든 생각, 모든 언행을 네 육체와 영혼으로 나를 찬미하기 위하여 하나의 사랑의 불꽃으로 거룩한 희생으로 바쳤는가? 그리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태복음 25:21)”


그러면 충성된 청지기와 불충실한 청지기에 대하여 나중에 무엇이 남을 것입니까? 바른 재판관(=하나님)에 의하여 언도된 저 판결의 집행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영원한 세기에 걸쳐서 변화하는 일이 없는 상태 속에 고착시켜 버릴 것입니다.(=천국 또는 지옥) 당신이 영원에 걸쳐서 자신의 행위에 따라 갚음을 받는다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지옥)


Ⅳ. 결론


1. 이러한 솔직한 고찰에서 우리는 첫째로 이 짧고 불확실한 일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부분이 모든 언사, 모든 개념을 초월하여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이 미미한 것들도 진지한 관심이 요구된다.

아주 작다 해도 그것은 황금의 모래알이니

(이 시는 Gambold 의 Upon List'ning to the Vibrations of a Clock에서의 인용, 웨슬리는 이것을 Maral and Sacred Poems, Vol, ⅲ p.195에 인용 인쇄했다.)


이러한 모래 한 알까지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이 인간의 콧구멍에 있는 한, 그것들은 모두 더욱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하는 일은 모든 인간의 자녀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까?


2. 우리는 이 사실에서 둘째로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시간의 사명, 행동이나 말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체 시간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선이거나 악이거나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τά ἀλλὀτρια 즉 타인의 재산이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되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어느 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된다면 모두가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악합니다. 다시, 우리가 끊임없이 은혜 안에서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산 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을 더하고 우리를 은혜 안에서 성장시키는 사고와 언행은 모두 좋은 것이요 이 지식을 더하지 않게 하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또는 당연히 악입니다.


3. 셋째로, 이 사실에서는 공덕(功德)의 행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웁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의무 이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저것만 받은 것이 아니요 혹은 많은 것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당연히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계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만일에 우리가 전부가 아니요 그 이하의 것을 하나님께 지불한다면 우리는 충실한 청지기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삯을 받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8) 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만일 우리가 힘껏 일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가 현명한 청지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일들은 무엇이나 버려두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껏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4. 형제들이여 , “당신들 중에 명철과 총명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역대하 2:12 참조), 그 사람은 그 인격에 합당하게 걸음으로써 위로부터의 지혜를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그가 자신을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여러 가지 선물의 청지기로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조리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정하신 그 부서에 적당한 것이 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지혜와 결의와 인내와 절제의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요구는 당신이 이제까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나 당신이 은혜로써 가질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에게 넉넉하며 또 당신이 아는 대로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하기”(마가복음 9:23)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로마서 13:14)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갑주로 무장하시오”(에베소서 6:13), 그렇게 하면 당신은 자신의 모든 언행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가, 아니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복종으로 향해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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