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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성령을 받은 징표들(휫필드)

본문

휫필드 설교

 

성령을 받은 징표들 (Marks of Having Received the Holy Ghost)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 : 2)

 


이 말씀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성령을 받았느냐는 이 질문은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성(聖)바울이 한 것으로 견진성사(confirmation) 때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제자들이 이미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의 즉각적인 강림은 수반하지 않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인한 성령을 받았는지 물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아니라고 답을 하자 바울은 즉시 이들에게 예수님 이름으로 먼저 세례를 주고 그 다음 안수를 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가장 옳으냐는 결정하기 쉽지도 않고 절실히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이든 상관없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이 말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살펴본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누구인가를 알아보고, 우리 모두 성령을 받아야 하며, 그런 다음 진정한 신앙인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누구인가를 알아본다.

둘째,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성경적 징표를 제시하겠다.

셋째, 결론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교리와 관련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성령은 영원히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 성부, 성자와 함께 실존하고 영원히 거하는 존재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지만 그 지위는 대등하다. 성스럽다(거룩하다)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성령 자체로 무한히 거룩하기 때문이요, 우리 안에 모든 거룩함을 이루고 마무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복된 성령은 한때 깊음의 표면 위에 운행했고, 복된 동정녀 마리아에 임해 거룩한 아기 예수님을 낳았다. 성령은 주님이 세례를 받아 물 속에서 나올 때 우리의 복된 주님께 비둘기같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려와 임하였다. 이후 오순절 날에는 모든 사도들의 머리 위에 불같은 혀로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 심령의 표면 위에 운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에게 임하게 되며, 우리는 성령 곧 죄를 깨끗이 하는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참된 지체로 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리운 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있는 줄 모르느냐.”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것임을 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에게 많은 기사와 표적을 동반하면서 신비롭게 임했던 성령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화의 은총들로 역사하는 성령을 정말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절대적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때의 인간은 순전했다. 말하자면 거룩한 성경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은 만들어졌다.” 이렇듯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베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한 명령으로 세상을 만들고 그 후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 생기를 불어 넣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이루는 완벽한 요소들을 닮은 것들로 덧입었다. 인간을 완벽한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창조의 마지막 단계였다. 도덕적으로나 물질적 세계로나 완벽한 존재.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거룩한 분에 근접한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닮은 모습을 보고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 육체의 모든 부분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 사랑스럽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 그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이렇듯 거룩한 본성에의 참여자라고 할 때 인간이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이 계속 거룩했더라면 여전히 유효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 상태에 두었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것을 먹되 선악의 나무는 제외했다. 그 나무의 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일시적인 사망에 속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영적 사망에 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행복을 보장해 주었던 하나님의 생기가 더 이상 인간에게 불어 넣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유한한 피조물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키기 쉬운 조건이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아니 불행한 인간은 마귀에의 꾐을 받아 조물주와 같아지려는 욕망에 금지된 과일을 먹었다. 그럼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해 책망했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타락하자마다 자신이 벌거벗었다고 불평했다. 육체적으로 벌거벗었을 뿐만 아니라 타락하기 전에는 자신의 영혼을 덮고 아름답게 해주었던 거룩한 은총에 대해서도 벌거벗고 황폐해진 것이다. 이 불행한 반란으로 가시적인 창조의 세계는 무질서로 떨어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엉겅퀴와 가시덤불은 혼란과 반역으로 점철된 이 생명 없는 불행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타락 후 내적으로는 욕망과 정염이 솟아올라 즉시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애통하게도, 인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띠지 못하게 되었다. 악마의 죄를 모방했으므로 인간은 말 그대로 악마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악마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께 직접 대적하는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났다. 뿌리가 악하니 그 가지도 의당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다.” 즉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후 스스로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듯이 똑같이 부패한 본성을 지닌 아들을 낳았다. 성경의 기록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우리 인간은 완전히 죄악과 패역한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기란 불가능하다. 빛이 어둠과 사귈 수 없듯이 하나님과 패역한 벨리알의 자식들과 교통할 수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목적과 그런 계획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바로 이 무질서를 종식하고 우리를 회복하여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유지했던 원래의 권위를 지니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혈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이루게 하였다. 더불어 우리에게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주었다. 성령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거룩한 형상을 인치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향유하며 살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위대한 목적이다. 아니 이 세계 자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이것이다.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화되면 그 순간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릴 것이다. 모든 것들이(the elements) 뜨거운 열로 녹아내려 이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이다.

성령의 성화, 곧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신생, “이것이 없이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성령의 성화를 성 바울은 “우리 마음이 영으로 새로워졌다”고 표현했다. 성령은 거룩함의 근원으로 성령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지체라 이르기 전에 성령을 받아야 한다. 둘째,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 받은 징표가 어떤 것인지 성경을 근거로 알아 보자.

1. 기도와 간구의 영을 받는다. 이것은 은총의 영(성령)에 항상 동반한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자마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울(바울)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아나니아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한 사람)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중임을 밝혔다.(사 9장)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주야로 부르짖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령이 하시는 위대한 일 중 하나는 우리에게 죄를 확실히 인식하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구주의 족한 업적으로 인하여 죄사함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은총을 주시길 갈구하게 한다. 다가올 세상의 권세가 너무나 강력한 것을 느낀 자는 자신의 영이 거의 죽은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항상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주여,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아니면 끈질긴 소경 바들메오가 말한 것처럼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할 것이다.

복된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사 자주 은총의 보좌에 나아가(기도하여) 성령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종종 혼자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 날이 새기 전에 한참동안 기도했다. 아니 예수님은 기도로 여러 밤을 새웠다. 거룩한 예수님과 함께한 영과 똑같은 영에 참예한 자라면 누구나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 너무나 깊이 하나님께로 이끌려 수시로 거룩한 두 손과 마음을 바쳐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사실은 성령을 실질적으로 이미 받은 사람조차도 간구의 영이 종종 사그라진다는 점이다. 그만큼 간구의 영은 예민하다. 영적으로 건조해지고 심령이 메마르게 되면 생기도 없고 퇴보한 상태에서 의무적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 자체도 자신의 십자가로 인식하고 비록 이러한 상태가 비통한 것이긴 하지만 꾸준히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 평소처럼 강력하게 열정을 쏟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 마음만은 하나님께로 고정되어 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께서 나름의 지혜로운 이유 때문에 그 심령들을 마비시킨 것이다.

형식적인 신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이들은 아예 기도 자체를 하지 않지만. 만약 형식적 신자들이 기도를 하려고 골방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것은 마지못해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기 양심에 혹 있을 수 있는 꺼리낌을 없애려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참된 신자는 음식을 먹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 수 없듯이 기도를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참된 신자는 기도로 영양을 공급받았음을 실제적이고도 예민하게 알게 된다. 이것은 마치 음식으로 몸에 영양을 공급받은 것을 아는 것과 같다.


2, 성경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징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고 범죄할 수 없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범죄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기독교인은 죄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 그 의미는 이렇게 보아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께로 거듭난 자는 습관적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고의적인 범죄를 짓지 않는다. 모든 회심한 자와 마찬가지로 죄에서 죽은 자가 어떻게 죄 안에 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예기치 못하게 또는 격렬한 미혹으로 범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사례를 다윗의 간통과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회심한 자는 다윗과 베드로의 경우처럼 즉각 다시 일어나 세상에서 벗어나 통회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으로 연합하여 신실한 회개의 눈물로 죄를 씻는 것이다. 그런 다음 미래의 자기 삶에서는 두 배로 더 조심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룩함을 완전하게 한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할 수 없다.”는 사도 요한의 이 말의 의미가 어떻게 적절히 적용되는지 탐욕스러운 속물의 예로 보자. 탐욕스러운 속물의 일반적 속성은 방탕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갑자기 돌아온 탕아가 된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배나 더 주의하여 다시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게 된다. 거듭난 자는 누구나 다 이와 같다. 거듭난 자가 범죄하는 것은 자기 마음의 기본 틀과 방향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에 빠져)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는 (자기 죄에 대해) 관대한 성향을 지니지만 거듭난 자는 혹 죄에 끌려들어가도 하시라도 배나 열성을 가지고 즉시 회개하며 자기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반면 회심하지 않은 죄인은 온갖 죄로 완전히 죽은 자이다. 그런데 비록 세속적인 이기심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떤 큰 죄를 짓지 않으면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아버리지 않아도 되고 아각도 그 나름대로 의로우니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현 상태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인) 사울의 모습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어떤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든 성령을 받지는 못했다.


3. 성령을 받으면 세상을 이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 여기서 세상이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이다. 이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이 세상의 것들을 부인하여(관계를 끊어) 세상을 따르거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뜻한다. 위로부터 난 자마다 위에 것을 사모한다. 심령 속에 거룩한 힘을 느끼는 것이다. 그 힘 때문에 마음이 하늘로 향하게 된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여 찾는 것처럼 그 심령은 자기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을 향유하는데 갈급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제 천국의 일에 잡히게 되었다고 이 세상의 일을 무시하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영적인 자는 감히 하루라도 빈둥거리며 소일하지 못한다. 비록 멸망할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수고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쓰고 주의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와 요셉과 다니엘처럼 자신을 자기 형제들보다 높이셨더라도 자기 자신은 이 땅에서 이방인이요 순례자로 자처한다. 생명의 원리를 받았으므로 그는 이제 눈으로 걷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걷는다. 그의 소망은 멸하지 않는 것으로 충만하고,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헛되고 영적으로 애통할 것으로 본다. 한 마디로 세상 안에 있으되 세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신령한 즐거움을 누리도록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그의 심령을 충족시킬 것이 없다.

영원히 복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이긴 완전한 표본이다. 계속 선한 일을 하시면서 고통과 핍박 속에 항상 살았지만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 그 대화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영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적절히 잘 배합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대화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입증한다.

이와는 반대로 이 땅에 있는 회심하지 않은 자는 세속적이다.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쫓게 된다. 이 세상에서는 참된 행복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또 있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은 그는 본질적으로 허약한 영으로 인해 굴복하게 된다. 결국 뱀(사탄)에게 내린 저주를 선택하게 되고 평생 이 땅의 흙을 먹게 된다.


4. 성령을 받은 또 다른 징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안다.”고 말한다.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리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복음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에 거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거한다.”

그러나 이 사랑을 본능적인 부드러움이나 온화함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즉 이것은 세속적 동기에 기초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연인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형제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사랑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우리 주 예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들(성도들)을 더욱 사랑한다.

이런 사랑이 기독교인의 사랑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준 새로운 계명이다. 사랑의 대상에 있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동기에서 새로운 것이다. 그 본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칭찬을 받은 이유도 그들에게 이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생겼다. “기독교인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라.” 이런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우리 몸을 불태운다 해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이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으며 편파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이 모습만으로 다가올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사랑한 그 사랑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심지어 가장 악질인 사람까지 사랑했다. 예수님은 완악한 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고, 거룩한 모양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그 심령을 특별히 사랑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이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그 젊은이가 말하길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좇으라고 했다. 여기까지 예수님이 그 젊은이의 영혼을 사랑한 것이다. 예수님이 고매한 믿음의 사례를 접했을 때 비록 그 사람이 이스라엘로 보면 이방인인 로마군 백부장의 경우나 헬라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의 경우에서도 예수님이 얼마나 경이로워 하시고 기뻐하시고 또 무어라 칭찬하여 말하였던가?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영적 제자들은 신령과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사람을,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차이가 없고 다만 사소한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고 해도, 섬심성의껏 사랑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자연인의 사랑은 단번에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하지 못한다. 성령을 실제로 받았는데 사랑이 충만하지 못할 수도 있다. (베드로가 고넬로에게 가기 꺼려할 때 그 당시 베드로는 분명히 성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심령의 모든 속좁은 성질은 매일매일 자기 안에서 줄어들기 마련이고, 편협된 신앙으로 분열의 벽을 쌓고 당을 짓는 열성은 점점 없어진다. 천국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점점 더 확대된다. 거기엔 민족과 나라와 방언에 따른 차이가 없다.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영원히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5. 성령을 받은 다섯 번째 징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후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의무이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지 못한다. 심지어 세리나 죄인의 의를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남보다 나을 게 무엇이냐?” 우리가 특별히 나은 게 무엇인가? “세리도 이와같이 하지 않느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님께서 손수 우리에게 본으로 보이셨다. 멸망의 도시(the bloody city, 예루살렘)를 놓고 울었으며, 자신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내놓아 고난을 받았으며, 배반자 가룟 유다의 질문을 받고 “인자가 입맞추는 자가 배반하느니라.” 했고, 특히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죽인 살인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자연인으로서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는 누구에게나 이 일은 실천적이면서 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거듭난다면 당연히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를 너무나 미워하는 최악의 원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선대함으로 기뻐한다. 물론 그 사랑의 정도는 하나님의 완벽한 수준에는 못 미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주시고 태양빛을 주신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도록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여있던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게 했다.

이상 다섯 가지 외에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많은 징표들이 성경 곳곳에 있다. “세상적인 마음으로 있으면 사망이지만 영적인 마음은 생명이요 평안이다.” “성령의 열매는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 …”라 했다.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다. 어쨌든 성령을 받은 표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다. 감히 확언하건대, 누구든지 공평무사하게 자신의 성령받은 상태를 살펴보면 앞에서 말한 표시가 그의 심령 위에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천사가 그의 죄사함이 천국에서 인쳐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확실하다.

나 개인적으로도 신령한 은총을 보았고 거룩한 천국의 심성이 내 심령에 인쳐졌고, 천국으로부터 천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들아, 힘내라. 네 죄가 사함 받았노라.’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증거들이며,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우리 안에서 증거하신 것이다. 이런 증거들 위에 흰 돌이 서고, 이것은 성령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심령 속에 천국 유업의 앞부분을 맛본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영광이 시작된 것이며,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선물을 달라고 하면 (하늘로부터) 좋은 것들이, 아니 더 좋은 것들이 올 것이며, 이것을 사람이든 마귀든 그 누구라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이제 앞에서 말한 대로 성령을 받았는지와 관련해 몇 가지 부류로 사람들을 나누어 보자.

1. 불법과 죄악에 죽은 자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 때문에 울었듯이 내가 이들 때문에 얼마나 울 수 있을까? 슬프도다. 이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주야로 기도하지도 않고, 거의 아니 전혀 기도하지도 않는 죄인아, 어떤 끔찍한 지경에 이르게 되려고 하느냐. 하나님께로 거듭나 범죄하지 않게 되지 않고, 너무나 깊이 마귀의 본성 속에 빠져들어 마귀의 행실을 모방하고 있느냐? 이 세상을 이겨 세상을 따르거나 끌려다니지 않는 상태가 되지 못하고 계속 육체에 공헌하는 양식을 제공하여 육체의 탐욕을 충족시키고 있구나. 모든 사람을 아니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함양하기는커녕 증오와 악과 복수심으로 가득하고 또 자신을 천하게 낮추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들을 조소하는 그런 마음을 당신은 갖고 있다. 오, 죄인들이여, 하나님이 너무나 오염된 곤고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리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허락함으로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약간의 즐거움이라도 맛볼 수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럴 수 없다. 천국은 그 자체로 당신과는 관계가 없다. 당신 심령 속에 있는 악마적 기질 때문에 복된 집에서 온전히 누릴 영적 복락을 당신은 전혀 제대로 누릴 수 없다. 당신이 빛의 성도들과 함께 천국의 유업에 복된 참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당신 삶에서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의인은 물론 당신도 하나님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딱 한 번만 하나님을 본다. 절대 한 번 이상 볼 수 없다. 당신이 당신 안에 악마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 때, 아니 당신은 악마와 함께 거하고 있을 때 악마와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악마와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회심하라. 그리하여 네 죄가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성령을 받았는지 점검하라.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지옥의 저주를 어찌 피할 수 있을꼬?


2. 이번에는 거짓 구원에 소망을 두어 미혹된 사람들을 보자. 괜찮은 교육을 받거나 여타 양심의 제약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광폭한 상태에 말려들지는 않은 사람들 중에는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거듭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거듭났다는 게 성령의 열매로 보이는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가? 죄를 범하지 않는가? 세상을 이겼는가? 예수님이 원수와 모든 인류를 사랑했듯이 그렇게 당신도 원수와 온 인류를 사랑하는가?

형제여, 위에서 말한 것들이 당신 안에 풍성히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신임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계몽된 자라 하더라도 아직 회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아니 죄 속에 있다. 옛 아담의 본성이 여전히 당신의 심령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아담의 본성이 당신 심령의 자리에 접목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신 자신을 선량한 성품과 교양있는 교육 등과 같은 장식물로 치장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아말렉 왕 아각처럼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나갔도다.”라고 말하지 말라. 사무엘서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공의로 너를 갈갈이 찢어버릴 것이다.(사무엘이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 사무엘 상 15 : 33) 당신이 인간의 눈에는 아무리 존경스럽게 비춰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돔의 사과에 불과하다. 아니 눈으로 덮인 똥더미(거름더미)와 같아 하얗게 덮여 있어 겉으로 보면 얼핏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온갖 부패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심판날에 “정녕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씀을 듣고 내쫓기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고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로도 얻을 수 있다.


3.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 하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이들은 노예의 영(the Spirit of bondage)과 더불어 시험을 받고 있어 아직 성령을 받은 징표는 없다. 이들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누가 우리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꼬?

그러나 이 어린 자들아 두려워 말라. 지금은 은총의 유아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꺼이 주고자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원될 것이요, 너희가 갈급히 찾는 것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갈급히 찾는 것을 예수님 또한 찾을 것이라고 했다.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으리라. 오직 그것을 쉬지 말고 추구하기만 하라. 위로부터 거듭났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을 확실히 알기까지는 네 심령에 안식하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을 먹으라. 즉 하나님의 영이 네 영으로 더불어 네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 때까지 쉬지 말라.


4. 성령을 받아 모든 거룩한 은총에 들어선 사람들, 즉 거의 영광에 도달한 사람들을 보자.

아, 복된 성도들! 당신의 천국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미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다. 이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복된 변화가 올 때까지, 즉 당신의 추수가 완수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내가 당신을 보고 칭찬하노라. 그러나 슬프게도 세상 사람들은 당신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구나. 당신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음을 내가 안다. 당신은 위로를 얻었고, 먹을 고기가 있다. 이것에 대해 죄악에 물들고 속물적이고 성도를 조롱하는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당신에게 쉽고(설교 원고 본문에는 ‘쉽지 않고’로 나왔는데 오타인듯 - 역자), 그 짐은 가볍다. 당신은 신생의 고통을 통과했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영적으로 당신 심령 안에 자리했음을 기뻐한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당신은 안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당신의 몸은 비록 땅 위에 있지만 당신의 영혼과 마음은 천국에 있다. 당신의 믿음으로 또 끊임없는 성찰로 복된 천사와 같이 천국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본다.

내가 당신더러 전진하라고 권면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당신은 성령 안에서 걷을 때 큰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권면한다면 인내를 갖고 잠시 동안이나마 자기 심령을 온전히 하기에 계속 힘쓰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짐에서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풍성한 천국 문을 들어가 천국의 영원한 즐거움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최고의 은총(felicity) 속에 들어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를 베푸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예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토록 돌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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