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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 마음의 할례 (1733)

본문

마음의 할례
The Circumcision of the Heart
                            (1733)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롬2:29)



서론



한 저명한 인사의 말 가운데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의무를 설교하는 자는,

대부분의 청중에 의해서
‘새로운 교리의 창시자’로 존경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종교의 본질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이 세상의 영으로부터 구별하는
진리가 제시되면 이렇게 외칩니다.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느냐?(행17:20)

단지“예수님과 부활”(행17:18)과 이에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기본 진리의 내용을 설교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에게는 난해한 말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살아 있으나
하나님을 향하여는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되게 해석하여
쓸데없는 것과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려합니다.

그는
단순하고 명백한 의미로 해석된
‘하나님의 영’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고전 2:14)

그것은
그들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은
영적인 감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그 감각이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 감각이 없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지혜도 되고
힘도 되는 것을
인간의 무익한 공상처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하여 마음에 받는 할례”(롬2:29)

이것은
영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봉자이며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태에 있는 자의
특색 있는 표지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할례도, 세례도,
어떤 다른 외적 형식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
혼과 마음과 영의 바른 상태입니다.

이 진리가
영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자신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마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그처럼 당신의 위대한 주님을 따른다면

  이 세상,
  곧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착하고 성실한 종아, 잘하였다.’(마 25:21)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할례,
  곧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일의 징표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어리석게 되는 것임을 아십시오.

  당신은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그날에
  자신이 칭찬 받을 것을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날에
  당신은 인간들과 천사들의 거대한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나는 첫째로,
마음의 할례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탐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생각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Ⅱ. 마음의 할례



첫째로,
나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할례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성경에서 성결이라고 불리는
영혼의 습성적인 성향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덕을 부여받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할 정도로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음의 할례는 겸손, 믿음,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1. 겸손


  (1)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

겸손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입니다.

겸손은
부패한 본성에서 생겨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완전에 대한 심한 자만심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재능과 학식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나는 부자다, 지혜롭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계 3:17)

겸손은
이러한 헛된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래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자
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케 합니다.

겸손은
최선의 상태에서라도
우리가 죄와 허영의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또한
혼란과 무지와 잘못이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불법하고 세속적이며
관능적이고 악마적인 정열이
우리의 의지에 권위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영혼 속에는 온전한 부분이 전혀 없으며,
우리의 본성의 모든 토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2) 전적 무능함을 발견

동시에
우리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자기를 충분히 도울 수가 없음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
우리는 죄에 죄를 더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을 창조한다든지,

혹은
우리의 전 영혼을
의와 참된 성결로 갱신하기 위해
좋은 생각을 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힘으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선을 원한다든지, 선을 행한다든지 하게 하십니다.
 
  (3)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경시

우리 본성의
죄악성과 무기력성에 대한 바른 판단의
확실한 결과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가정되어 있는 어떤 탁월성에 대한,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요 5:41)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알고 있는 일에
칭찬을 원하지도 않거니와 이를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받는 판단에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고전 4:3)

세평이
그를 칭찬해서 말한 것 혹은 거슬러서 말한 것을
자기의 가슴속에 느끼고 있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이 세상의 신은 물론이요
이 세상도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딛 1:21)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산을 지키는 충성된 청지기라고
인정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이런 인정이 동료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는 그들의 인정받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으려는 이유가 이렇기에,
그는 전혀 이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바를 행하실 때
그 어떤 도구도 필요 없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종들을
일으키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마음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병에 대한 지식에 의하여
더욱더 그 질병의 일부인
교만과 허영으로부터 깨끗해지며,

그 지식은 기쁜 마음으로
마음의 할례가 시사하는 두 번째 의미를
수용하도록 도와줍니다.


2. 믿음


 (1) 진리에 대한 동의

그것은 믿음이며,
이 믿음만이 그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늘 아래에서 그들의 질환을 고치기 위해 주어진
유일한 의약입니다.

믿음은
눈먼 자의 가장 좋은 안내자이며,
흑암 속에 있는 자들의 가장 확실한 빛이고,
어리석은 자의 완전한 교사입니다.

믿음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입니다.

그것은
부패한 이성의 모든 편견,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모든 그릇된
악한 관습과 습성,

하나님께서 어리석게 만드신
이 세상의 지혜를 파괴시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지식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장애물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고후 10:5) 것입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막 9:23)

마음의 눈을 밝히 사
그는 무엇이 자기의 소명인가를 봅니다.
 
그의 몸과 영혼을 위하여
높은 대가로 자기를 속량해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야말로
그의 소명입니다.

그의 몸도 영혼도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역에
쓰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의 크심”이 어떠한가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죄 가운데서 죽은 우리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고전 3:13)으로서
말미암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이 믿음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에 대한
확고한 동의입니다.

특히
다음의 중요한 진리에 대한 동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딤전 1:15)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자기 몸에 친히 짊어지셨습니다.”(벧전 2:24)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화해의 제물이며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입니다.”
                                            (요일 2:2)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

그러나
믿음은 동의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죄인인
나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의 거저 주시는 분수에 넘치는 사랑에 대한
신적인 증거 혹은 확신입니다.

성령으로써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에 대한
확실한 신뢰입니다.

이 신뢰로써
참되게 믿는 자는 누구나 다
다음과 같이 증거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십니다.”(욥19:25)

“나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요일 2:1)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시오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한 화해의 제물이십니다.”
                                    (요일 2:1-2)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갈 2:20)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엡 1:7)

이러한 믿음은
그것을 불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보이는 일에
실패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

그들을 굳세게 하사
더 이상 죄의 욕망에서
죄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지체를 죄에 내어 주어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 대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게 하십니다.


3. 소망

이처럼
믿음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또한 소망으로서 강한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가
그 다음으로 의미하는 사항입니다.


  (1) 증거

하나님의 영과 함께
그들의 영이 그 마음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 해 줍니다.
실로
이 동일한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여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로 섰다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확신을 주십니다.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눈에
바르게 보이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이제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을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인하여
최후까지 그 걸음을 걸어갈 것임에 대하여
훌륭한 확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는다는
생동감 넘치는 기대감과,

그들을 위해서
영광의 면류관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다는
즐거운 예상을 그들에게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소망의 닻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이 괴로움 많은 세상 물결의 한복판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만 혹은 절망이라는
저 치명적인 바위에도 부딪히는 것을
모면하는 것입니다.

그는
주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오해함으로써
낙담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롬2:4)
않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경주의 어려움이
자기의 힘으로 해낼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이
자기의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해낼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이라고도
예기(豫期)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의 전투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은
만일 그 손이 하려고 찾아낸 것을 모두
그가“전력을 다하여 힘쓴다면 그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는다.”(고전 15:58)고 그에게 보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 경험은 그가 다음과 같은 헛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합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유리한 입장을 얻을 수 있다거나,

나약한 마음과 허약한 손에 의해
미덕이 나타나기도 하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거나,

위대한
이방인을 위한 사도와 같은 행로를
걷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미덕이 나타난다거나,

하나님의 칭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헛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목표가 불분명한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을 치는
  권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고전 9:26-27)


  (2) 성화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는
어려움을 견디기 위하여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합니다.

이로써
굳세어지고 강해져서
다만 어두움의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욕망과 애정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요일3:3)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약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이전에
그의 영혼을 소유하고 더럽혔던
욕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그의 매일의 관심입니다.

불결, 시기, 악의, 분노로부터,
곧 육체로 말미암은 본성의 부패로부터
깨끗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전인 자신의 몸이
비천하고 불결한 것을 전연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결의 영이 살아 계시는
성결한 집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4. 사랑

그러나
깊은 겸손과 확고한 믿음에
당신은 생생한 소망을 첨가하여

당신의 마음을
본성적인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했음에도
당신에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완전하게 되려 한다면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을 더할 때에
당신은 마음의 할례를 가집니다.


  (1) 율법의 완성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계명의 종결입니다.”(롬13:10)

사랑에 연관된
매우 훌륭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미덕의 본질, 정신, 생명입니다.

사랑은 다만
최초의 위대한 계명이 아니라
모든 계명이 하나로 된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과
    모든 순결한 것과
    모든 사랑스러운 것,
    혹은 영예로운 것


“덕스러운 것과 칭찬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빌4:8)
그러한 것은 모두 사랑이라는 말에 포함됩니다.

사랑 안에
완전과 영광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가장 귀중한 율법은 이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10:27)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랑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더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상상하듯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취할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성결의 샘이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죄의 창시자라고 가정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여러 피조물의 사용에서
불가분의 방식으로 기쁨을 첨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의 의미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와 사도들이
그 율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오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신 6:4)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너는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시 4:5)

“우리 영혼이 사모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니이다.”(사 26:8)

이 구절들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일하고 완전한 선이 당신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 삶의 주체

당신들은 다만 하나의 사실,
그 자체를 위하여 갈망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인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당신들은 자기 영혼에게
단 하나의 행복을 제안하여야 합니다.

자신들의 영혼을 만드신 분과의 일치,

“하나님과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요일 1:3)을
가지는 일,

한 성령 안에서 주 하나님과 결합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까지
유일한 목적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과 영원에 걸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이 목적에 따르는 한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 이외의 일을
갈망하십시오.

그것이
창조자에게로 인도할 때에
피조물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 당신의 눈길이 더듬는
영광스러운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모든 애정과 사고와 말과 행위를
거기 수반하게 하십시오.

당신들이 바라거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모든 것,
구하거나 피하거나 하는 모든 것,
생각하고 말하고 혹은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당신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의 근원임은 물론이요
유일한 목적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목적이나 궁극적 목적도 가지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일은 다만 하나뿐이다.”(눅 10:42)

그리고 만일
당신의 눈이 단순히 이 하나에 집중해 있다면
“온몸이 밝습니다.”(눅 11:34)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힘쓰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뿐입니다.” (빌 3:13-14)

사도 야고보도 말했습니다.

“죄인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약4:8)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6)

기분 좋게
외적인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얻는 육신의 정욕을,

그 정욕의
신기함, 위대함, 혹은 아름다운에 의한 안목의 정욕,
공상의 정욕을,

당당한 외관, 장엄, 권력
혹은 그것의 일반적인 결과인
칭찬 숭배로서의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켜 주는 것 가운데서 행복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아버지께서 승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지배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표지입니다.










Ⅲ. 몇 가지 제언



이상에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할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로,
나는 그러한 탐구에서
자연히 제기되는 물음에 대해 성찰하려 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단순한 규준을 세워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모든 사람이 자기가 세상으로부터 난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첫째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에서 분명하듯이
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의 마음은
겸손으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눈에 자신은 소인배요,
비열하고 천한 자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타고난 대로의 본성의 부패에 대해
깊이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본성의 부패로써
그는 본래적인 의에서 매우 멀리 있습니다.

모든 악을 범하기 쉽고,
모든 선을 싫어하며,
부패했고 혐오스럽습니다.

그는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롬 8:7)

그는
끊임없이 영혼의 깊은 속에서
다음의 사실을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위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눈에 좋은 것
혹은 만족하실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상태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정말로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영광”(요 12:34)만을 구합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영광은
바라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향할 경우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이상의 사실에서
자연히 나오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칭찬을 얻는 사람은
모두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마음은
믿음, 곧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골 2:12)으로
할례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감각, 욕망, 격정,

혹은 이 세상이 우상시하고 있는,
맹인의 맹목적 인도자인
자연적 이성에 의해 인도받기를 거절하고,

그는
믿음으로 생활하며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 같이”(히 11:27)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그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자기의
모든 욕망, 계획, 사고, 행동과 말을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저 장막 안에 들어간 사람처럼 통제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것은
그들이 이 믿음과 더 잘 친숙해지는 일입니다.

그들은
시간과 수고를 다른 기초를 놓는 일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놓으려는 종교의 기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물의 적합성,
미덕의 고유한 탁월성,
거기서 흘러나오는 행동의 아름다움이 그것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바대로
선악에 대한 도리와 존재들의 상호 관계가 그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무의 기초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성경적인 기초와 일치하든지
아니면 일치하지 않든가 합니다.

만일 일치한다면
왜 선의의 사람들이 당황하며,

가장 수월한 진리마저도
모호하게 하는 용어들의 혼돈에 의해
율법의 중대한 사항에서 멀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누가 이 새로운 교리의 창시자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창시자는 자칫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와 같은 자일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갈 1:8)

우리의 복음은
선한 행위의 기초로서
믿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초로서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창시자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영감 자와 완성 자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우리가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만이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버린 인생을 살리시고,
기독교적 생명의 숨결을 그들 속에
불어넣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한 욕구가 선한 결과로 끝나도록
은혜로 그들을 앞서 행하고, 동행하시고, 뒤따르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롬 8“14)

이것이
참된 종교와 미덕에 대한
하나님의 짧고 단순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기초 외에는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고전 3:11)



3.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하십시오.

이상에 언급한 사실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두 다음과 같은 사람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롬 8:16)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상과 면류관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섬김에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의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사람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가끔 그리고 분명하게 보상을 미리 내다보는 것처럼
수고를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환난의 경한 것을 영원하고 큰 영광으로 삼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셔서
  산 희망을 가지게 하시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는
  분깃을 이어받을 자로 해 주실”(벧전 1:3-4)때까지는,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되어 있어
  하나님도 없이 세상에서 사는”(엡 2:12)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 계약의 조건을 이행하고
그 약속받은 것을 얻을 것이라는 즐거운 확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계약 자체를 불평하고
그 조건에 불손한 언사를 씁니다.

계약 조건들이 너무도 엄격하여서
아무도 그것을 따라 행동한 일이 아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불평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비난에 따르면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시킬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무장한 주인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기 손으로 지으신
무력한 인간들을 조롱하고
그들을 불가능한 일에 묶어 두어,

그들 자신의 힘도 하나님의 은혜도
그들이 그것을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복하라고 명령한 것 같습니다.

이 불경스런 자들은
극단으로 치우쳐서 전혀 수고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죄의 책임이 없다고 상상하도록 잘 설득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담의 자녀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마 7:13) 노력하지 않고,

괴로워함이 없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망입니다!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한 자”(시 51:5),
“속에 악동이 가득한 자”(눅11:39)가

  주님의 발자취를 밟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눅 9:23)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오른손을 찍어 버리고”(마 5:30),
“자기의 오른 눈을 빼어 버리는”(마 5:29)일을 하지 않고,

“주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요일 3:3)
  하려는 생각을 마음에 품는 일도
  어리석은 소망입니다.

그가
항상 지속적으로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경로를 거치지 않고,

자기의
옛 의견, 정열, 기질을 제거하여
흠잡힐 것이 없도록

“영과 혼과 몸을 완전하게 성화시킨다.”(살전 5:23)고
꿈꾸는 것도 어리석은 소망입니다.

위에 인용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이 밖의 무엇을 우리가 추정할 수 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박해와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며”(고후 12:10)
생활했습니다.

그는
“표징과 기사와 여러 가지 기적”(히 2:4)에 충만해지고
“셋째 하늘에까지 끌려 올라갔습니다.”(고후 12:2)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이 없다면
자기의 모든 미덕은 다 무너질 것이며

자기의 구원까지도
위험한 지경에 놓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불분명한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을 치는
  권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고전 9:26)

이로써
그는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달음박질을 하지 않는 자,
이처럼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자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박질을 하며,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거의 목적이 없는
권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만을 사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이상의 관찰에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목표가 없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헛되이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도, 안목의 정욕도,
이생의 자랑을 끊어 버리는 사랑은

전인적 인간,
곧 육체, 영혼,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대한
열렬한 추구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매우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으면,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뿐 아닙니다.
“내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유익이 없습니다.” (고전 13:1-3)

그러므로
여기 완전한 율법의 진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마음의 할례입니다.

모든 애정의 표현방식과 함께 영을,
그 영을 주신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모든 강물이 그 나온 곳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살아 있는 마음의 희생 이외의
다른 희생을 우리에게서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거룩한 사랑의 불꽃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하십시오.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나누어 주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투기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를 다른 자와 공유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쟁 상대 없이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을
궁극적 대상으로 하지 않는 계획이나 욕구를
조금이라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찍이 걸었던 길입니다.

그들은 죽었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살려고 바라지 마십시오.

당신의 모든 사고, 말,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에 유용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굳게 세우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아십시오.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전히 채우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순수한 의도로
당신의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확고히 주시하십시오.”

당신의 눈을
당신이 부름 받은 축복된 소망에 맞추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것에 봉사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때요
그 이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움직임,
입의 말, 손이 하는 모든 행위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의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추구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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