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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 험담의 치료 (1760)

본문

험담의 치료
The Cure of Evil-Speaking
(1760)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있는데서 충고하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이 확증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가서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장 15절 ~ 17절)


험담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마19:18)는
분명한 명령처럼,

위대한 사도는 사람에게
“험담하지 말라.”(딛3:2)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누가 이 명령을 정말로 존중하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1. 험담의 정의

험담(evil-speaking)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말(lying)이나 비방(slandering)과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성경말씀처럼 진실한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남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은
험담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험담이라는 것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하는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험담은 그것이 언급되었을 때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실제로 행하고 말했던
어떤 나쁜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에 술 취한 것을 보았거나,
또는 그 사람이 저주하고 욕하는 것을 듣고서,
그 사람이 없을 때 이 일을 말한다면
그것이 험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이것이
‘헐뜯다’(backbiting)라는 뜻으로 되어있는데
그 뜻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또한
이 말과 우리가 보통
‘소문을 퍼뜨린다.’(talebearing)고 하는
말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부드럽고 조용한 방법으로 전달하면
우리는 이것을‘수군거린다.’(whispering)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일이 나쁘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일 경우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그 내용은 동일합니다.

비록 주변적 상황은 다를지 몰라도
그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여전히 그 핵심은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본인이
그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답변할 수 없을 때,
제 삼자가 그 결점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험담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사람에게 험담하지 말라.’는 계명을
짓밟는 것이 됩니다.


2. 험담이 무서운 이유

그런데
사람의 지위와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 같은 죄가 얼마나 극도로 파급되어 있습니까!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가 끊임없이
이 죄 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서로의 의견이 같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깨끗합니다.
나는 항상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웠으며
입술의 문을 지켰습니다.”(시 141:3)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당신이 들었던 상당히 긴 대화 가운데
험담이 들어있지 않은 대화를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양심의 거리낌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험담이 있습니다.(행 24:16)

그런데
이 죄는 너무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 죄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이 위험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 죄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죄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기가 쉽습니다.

이런 경우에,
말하자면 모든 인류가
우리에 대적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례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게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와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험담을 모방하는 일에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더구나 험담은
외부에서는 물론 마음속으로부터
그렇게 하기를 바라게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때때로 험담하는 일을 만족해하거나
결과적으로 험담을 하려고 하는
나쁜 기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꾸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행동을 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허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킵니다.

분노, 원한,
그리고 모든 불친절한 기질들이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험담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이웃사람들의 죄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들”(딤전 6:9)을 만족시킵니다.

험담은 그 정체를 위장하고
우리를 공격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피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악한 사람들에 대하여 고상하고 관대한 의분 때문에
(거룩한 분노라고 말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여 화를 내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 때문에
마귀에게 봉사하기도 합니다.

단지 악한 사람들을 벌하려는 목적에서
이런 잘못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러한 열정이 그런 모든 일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소위
거룩이라는 탈을 쓰고
자기의 죄를 감추는 것입니다.


3. 험담을 피하는 길

그런데
이러한 함정을 피할 길은 없습니까?

질문할 것도 없이 그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위에서 인용한 본문 말씀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길로 방심하지 않고
한결같이 걸어가는 사람은 결코 남에 대하여
악한 말하기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법칙은
험담을 확실하게 예방하는 방법이거나
아니면 분명하게 치료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 앞의 구절들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 가운데

“실족케 하는 이들이 있음을 인하여
이 세상에 화가 있도다.”(마18:8)라고 하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이 재앙의 샘으로부터 이 세상에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마18:7)

(여기서 실족케 한다(offences)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사악하고,
어리석고,
약하기 때문에,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자는 아주 비참한 사람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나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리고, 자르고, 내던져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가장 즐겁고,
사랑스럽고,
유익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내가 실족당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그 다른 사람들이
아주 잘못된 일을 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다고 할 경우,

그들로 인하여 우리가 실족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범죄와 험담을
모두 피하는 분명한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치료의 방법


첫째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첫 번째 법칙은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형제, 즉 동료 그리스도인이
부인할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을
당신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듣는다면,
당신이 그 사실을 의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1. 개인적 권면

주저하지 말고 우선 그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가까이 갈 수 있다면
“당신과 그 사람만 단둘이 있는데서
그 죄에 대해서 충고하십시오.”

(1) 하나님의 영으로

물론 그렇게 할 때에는
그것을 올바른 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도록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충고가 성공하는 것은
어떤 정신으로 충고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충고가 주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대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뿐이시고
지금 당신이 말한 것 때문에
선한 결과를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것이라고 하는
깊고 통찰력 있는 확신을 가지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지키시고,
생각을 밝히시며,
기꺼이 축복해 주실 수 있는 그런 말을
당신이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2) 온유와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은
겸손한 마음은 물론
유순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실수하게 되면
온유(meekness)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상대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진리에 반대할 때에는
부드러운 마음(gentleness)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깨닫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물을 가지고도 끌 수가 없는’뜨거운 사랑의
정신으로 말하십시오.
사랑은 정복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사랑의 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곧은 목을 숙이게 하며,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살같이 변하게 하네.
견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녹이고, 꿰뚫으며, 부순다네.
[Charles Wesley]

그러므로
당신은 상대방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십시오.

그리하면
악을 선으로 갚아
그를 매우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일치하는지를 살피십시오.

자존심이나 자만심을 느끼지 않도록
시선, 몸짓, 말, 목소리를 조심하십시오.

권위적이거나
독선적인 것을 모두 피하십시오.

거만하거나
주제넘게 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피하십시오.

경멸, 건방짐, 얕보는 태도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똑같은 주의로써,
사람들에게 성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아주 분명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 속에 견책이나 욕설적인 비난이나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흥분된 표현을 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증오와 악의의 그림자를 드러내지 말고,
신랄하거나 심술궂은 표현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만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우러났다고 보이도록
관대함은 물론
부드러운 태도와 말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상냥함으로 인해
가장 심각하고 엄숙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방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그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는 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2. 대리인을 통한 권면

만일 당신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말할 기회가 없거나 또한 접근할 수 없다면
그 때는 사람을 보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그런 사람은 당신이 철저히 신뢰할 수 있는
그런 공통적인 친구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똑같은 목적에 부응할 수 있으면
당신이 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상당한 정도로 보충해 줄 것입니다.

다만 십자가를 피하기 위하여
마치 당신이 직접 말할 기회가 없는 것처럼
꾸미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또한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쉽게 단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당신 자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혀 말하지 않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방법을 쓰는 것이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 보다는
더 좋습니다.

3. 글을 통한 권면

그러나
만일 당신 자신이 직접 말할 수도 없고,
당신이 신뢰할 만한 대리자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상,
이런 경우라면 그 때는
글로 써서 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추천할 만한 방법인
그런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하나는,
우리가 충고해야할 사람이
너무 열정적이고 성급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어서,

특별히 자기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서 충고를 받을 때
이를 쉽게 참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글로 써서 보내는 것은 충고를 받아들이기 쉽도록
부드럽게 할 수는 있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견딜 수 없는 똑같은 말을
글로는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읽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심한 충격을 주거나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읽는 것은
혹시 처음 읽었을 때는
별로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혹시 나중에 두 번째로 읽게 될 경우
더 생각해 보면서 그들이 그 전에는 무시했던 것을
마음에 두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만일 당신의 이름을 첨부하면,
그것은 당신이 그와 대면하여 말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가 됩니다.

만일 이 일이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부적당하게 되지 않는 한,
당신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명령하신 단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방법을 취하도록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잘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방도가 없고
그 밖의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이 길이 바른 길이고,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만일 필요 하다면
다른 두개의 방법을 취하도록
주님께서 요구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이 첫 번째 방법을 취한 후에
단계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이 첫 번째 방법 이전에
또는 동시에 다른 어떤 방법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방법을 취하거나,
이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은
둘 다 똑같이 잘못된 일입니다.

‘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부담을 느끼기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변명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마음에 부담이 되셨습니까?

만일 당신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분명하신 명령을 복종치 않는 죄책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즉각적으로 그를 찾아가서
‘단둘이 있는데서’ 당신의 형제의 허물에 대해
충고하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 마음이 진정 완고하게 되지 않는 한,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짓밟고,
당신의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게 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마음의 부담을 없애는 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는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견책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죄로 손쉽게 사들인 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당신이 형제에게 가서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에게만 말하기 까지는,

내가 믿기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고 점점 더
마음의 부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4. 한 가지 예외

그러나
이 법칙에 대한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당사자가 없을지라도,
자신이 결백한 자임을 변호하기 위해
범죄자를 고발할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착수하지 못하도록 막고,

그런 행동을 모르는 사람에게
지체 없이 알리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에게 험담을 하지 말라’는
사도의 법칙은 제쳐 놓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당신 자신에게까지도
동시에 악을 행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험담하는 것은
합법적임은 물론 우리들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모든 험담은 그 본질에 있어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때때로 약으로서 사용하게 될 경우에도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약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외에는
전혀 이것을 사용해야 할 구실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때에라도 될 수 있는 한 적게 사용하십시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십시오.

언제나
‘단둘이 있는 데서만
그의 죄에 대해 그에게 충고하십시오.’











듣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가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그가
선을 악으로 갚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화를 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악한 길을 계속 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장 온화하고 부드러운 충고라도
효과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바라던 축복이
우리들 자신의 마음속에 되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1. 한 두 사람과 동행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분명하고 충분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때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십시오.

(1) 동행자의 조건

그들이 겸손한 영의 사람,
이렇게 하여 ‘겸손으로 옷 입은’사람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유순하고 온유하며, 인내하고, 오래 참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게 하며,
오히려 그 반대로 축복으로 갚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위로부터의 지혜를 부여받은
이해심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공평하고,
편파심이 없고,
어떤 편견도 없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데리고 갈 그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을
우리가 찾아가서 말을 해야 할
그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어떻게 진행할지 그 방법은
매 경우의 본질에 따라서 결정하되
사랑이 그 방법을 주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2) 동행자의 태도

모든 경우에
한 가지 특별한 방법만을 쓰도록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 일반적으로는,
그들이 그 일에 개입해 들어가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해 분노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지금 그들이 그에게 온 것이나
이 사건에 개입하는 모든 것은
단지 선의의 원리 때문이라는 것을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선언하도록
충고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하자면,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시도하기 전에,

당신이
이전에 그 사람과 대화한 것과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변호하여
어떤 말을 했는가를 반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경청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후에야,
두 세 사람의 증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이 확증되도록,

즉 그들의 권위의 무게를 더해 줌으로써
당신이 말했던 것들은 무엇이든지
보다 강한 힘을 갖도록 처리할 방법을
그들이 더욱 쉽게 판단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① 당신이 무슨 말을 했으며
그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를 간결하게
되풀이 할 필요가 없겠습니까?

② 당신이 말한 이유를 확대시키며
공개하거나 확인할 필요가 없겠습니까?

③ 당신의 견책이 얼마나 정당하고,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히므로,
당신의 견책의 무게를 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기에 추가했던 충고와 설득을
강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필요할 경우,
이후로는 말해진 것들이
증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 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선택의 여지나 다른 대안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이와 같이 하라고만
분명히 지시하셨을 뿐, 그것을 대신 할
그 밖의 다른 여지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유의해야만 합니다.

(3) 적절한 시기

주님께서는 또한
언제 이렇게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십니다.

즉,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첫 번째 단계를 취한 후
세 번째 단계를 취하기 전에 하라고 말입니다.

형제애적인
사랑의 위대한 기회를 맞이하여
우리와 더불어
책임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행한 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지는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단계가 취해지기 까지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
조심해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단계를 취하는 것을 등한히 하거나
어떤 다른 단계를 취한다면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항한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아무리 이 사실을 아름답게 꾸민다하더라도
우리의 죄는 우리를 발견할 것이며,
우리의 영혼에 부담을 지울 것입니다.


2. 교회에 말하십시오.

이 중요한 일에 있어서
우리가 철저히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지시를 한 가지 더 주셨습니다.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 때에는,
“그것을 교회에 말하십시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1) 교회란 누구인가?

단지 문제는
여기서 “교회”라고 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핵심에 주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합리적인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국교회,

즉,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 전체에 이것을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설사 말할 수 있다손 치더러도,
국가가 기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
답변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말의 뜻은 아닙니다.

또한
당신은 이것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국 국민 전체 집단에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의미의 답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말이 이렇게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런던 안에 있는 메도디스트들의
상호 연합되어 있는 “교회”, 또는 회중,

즉, 연합 신도회(society)에
매 회원들의 허물을 말한다는 것도
어떤 가치 있는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답으로서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교회의 목사님
또는 목사님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즉,
책망하는 편과 책망을 듣는 편이 함께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양떼의 감독자인 사람들,

그래서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해야 하는 자들로서”(히 13:17)
당신의 영혼과 그의 영혼을 감시하는
그들에게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2) 언제 말해야 하는가?

이 일은,
만일 여건이 잘 맞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당자가 출석한 가운데 행해야 하고,
물론 숨김없이 투명하게 하되,

이런 일의 성격상 허용되는 범위내의
모든 부드러움과 사랑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감독자들의 돌봄 아래 있는
사람들의 행동거지에 관련하여 결정하고
저지른 잘못의 과오에 따라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견책”(딛 2:15)하는 것은
본래 그들의 직무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렇게 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랑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행한 것입니다.

즉, 이제 당신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습니다.

만일 그가 영원히 망한다면,
그의 피가 그 자신의 머리에 돌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시 유의할 것은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취할 세 번째 단계이며,

이 단계는 그 순서에 있어서
다른 두 단계 이후에 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첫 번째 단계 이전에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두 번째 단계가 이와 동시에 일어날 수 도 있습니다.

즉 방법에 있어서 똑같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이나 목사님들이
죄지은 형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님들에게 한두 사람의 증인을 동반할 필요가 없고
목사님들이 이들을 대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단둘이 있는 데서만
당신의 형제의 죄에 대해 말한 후에
그것을 목사님들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족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행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영혼을 건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즉 그가 그 자신의 죄 가운데서 멸망한다면,
“그를 대하여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당신은 그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다만 기도 중에 그를
하나님께 부탁드릴 때만 생각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고,
그를 그 자신의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물론 당신은 그에게 여전히,
모든 다른 이방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부드러운 호의를 보일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공손히 대할 의무와
기회가 되는대로 인간애의 모든 직무를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친구관계,
친교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그와는 명백한 이방인과의 관계 이외의
다른 관계를 일체 갖지 마십시오.

(3)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키며 살아가는 규칙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이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얼마나 적습니까!

지구상에 얼마나 엷게 흩어져 있습니까!

보편적으로
이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이
어디에 있습니까?

유럽에서
그런 집단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대 브리튼 섬이나 또는 아일랜드 섬에 있습니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왕국들을
샅샅이 뒤져도 헛된 일일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여, 슬픈 일입니다!

프로테스탄트여,
종교개혁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슬픈 일입니다!

“오, 누가 나와 함께 악한 자들에 대항하여
일어날 것입니까?

누가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편에 설 것입니까?”(시 94:16).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까?”(왕상 13:14).

하나님의 은혜로
그대는 세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으로

“그대의 입에 경비를 세우며,
그대의 입술의 문을 지키기로”(시 141:3)
온전히 결심합니까?
이 시간부터 당신은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이 규칙을 지키며 살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의 형제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

당신은
“그에게 그의 허물에 대하여
당신과 그 사이에서만 말하겠습니까?”

그 후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겠습니까?”

오직 그렇게 한 다음에만
“그것을 교회에 말하겠습니까?”


3. 악한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가슴으로
오직 이것만을 목적을 삼는다면,
한 가지 교훈을 잘 배우십시오.

누가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거든
그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듣는 사람이 없다면,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세속의 속담에 따라 말한다면
도둑이나 그 도둑질한 물건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나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누가 당신이 듣는데서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면,
즉시 그의 말을 중지시키십시오.

아무리 그가 달콤하게 홀릴지라도,
그 홀리는 자의 목소리 듣는 것을
거부하십시오(시 58:5).

그로 하여금 그가 지금 어둠 속에서
칼로 찌르고 있는 그 사람,

지금 그가 그의 다섯 번째 갈비뼈 밑을
찌르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하여
대단히 부드럽고 순한 말씨로 말하며
그에 대한 많은 호의를 표현하도록 하십시오.

남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는
그 사람이 발설하지 않고서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괴롭다고 아무리 한탄할지라도

그의 말을 듣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십시오.

짐이 되어 부담스럽다! 바보 같은 그대여,














결론



그대는 마치도
“여인이 태아로 인하여 산고를 겪는 것처럼”
그대의 저주받은 비밀로 인하여
“산고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가서 주님이 명령하신 그 방법으로써
그대의 짐으로부터 건짐을 받으십시오.

첫째로,
“가서 당신의 형제에게 그의 허물을
당신과 그 사이에서만 말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한 두 명의” 서로에게 공동으로 친구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말하십시오.

만일 이 두 단계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효과가 없으면,
“그것을 교회에 말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영혼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교회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마십시오.

단, 한 가지 경우만이 예외입니다.

즉, 잘 못이 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는 예외입니다.

왜 당신은
그를 당신의 죄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짐을 지우는 짓을 하려 합니까?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능욕을 받으며,

그래서 조롱조로
‘메도디스트’라 불리는 당신들 모두가,

적어도 이 한 가지 경우에서라도
소위 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하여
한 모범을 세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은 남에 대하여 악한 말하기,
소문 퍼뜨리기,
귀엣말하기를 멀리하십시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당신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아무에 대해서도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좋은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원했든지 원지 않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을 당신의 구별되는 특징이 되게 하십시오.

즉,
‘메도디스트는
어떤 사람도 그의 등 뒤에서 비난하지 않는다.
이 열매로써 너희는 그가 메도디스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기부인의
놀라운 복된 효과를 우리는 우리의 가슴 안에서
즉시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를 좇았을 때”(히 12:14)
얼마나 우리의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겠습니까!”(사 48:18).

우리가 그와 같이
우리의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견고하게 하고 있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충만하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연합된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효과를 가져 오겠습니까?

형제 사랑을 방해하는
이 거대한 장애물이 제거된다면
형제사랑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증가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려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느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그와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명예롭게 된다면,
모든 지체가 그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고전 12:26).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형제를
“순전한 가슴으로 뜨겁게”(벧전 1:22)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심지어 거칠게 사고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놀라운 효과를
가져올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곧 우리에게서
그들의 수천의 형제들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어렴풋이나마 보고,

(배교자 쥴리안이
비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그의 궁정 신하들에게 그랬듯이)

“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보십시오!”라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주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그의 나라로
들어오도록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마지막의 숭고한 기도문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부터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나를 믿을 그들을 위하여 나는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주여,
그 때가 속히 오게 하시옵소서.

주여,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진실 안에서”(요일 3: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듯이,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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