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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목회자에게 보내는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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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 보내는 권면 


  형제들과 성직자들이여, 성공회에서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존재가
최고의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처럼 권면하게 된 사실을
건방지거나 오만하거나 헛된 일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이 과제를 나의 손으로 수행하도록 나에게 요청하신다고 믿는 그분
곧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에게 여전히 최고의 존경을 표하며
당신들과 나는 모두 그분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오랫동안 나의 영혼의 부담이 되어온 사실을 선언하는 것은
내가 사심 없는 참된 사랑에 진 빚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내가 이 글을 기술하는 것과 똑 같은 마음으로
당신들이 이 글을 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편견 없는 독자들은 내가 분노나 격분. 감정으로 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더욱이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도 혐오하는 마음, 곧 멸시하는 마음으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글을 쓰는 동기인 진지하고 온유한 사랑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나의 떡을 물에 던지기 원한다.
내가 수일 후에 그것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랑은 말의 담백성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과 내가 위선을 떨거나 제한되지 않도록 도와주지 않았는가?

  또한 그것은 “진리를 현현시킴으로써, 당신들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와주지 않았는가?

  따라서 나는 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 당신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
당신들의 교구에 속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에 대한 사랑 때문
당신들을 진지하게 대하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말하는 자에 대한 편견을 품지 말고 말의 내용을 공정하게 숙고해 주기 바란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허위이거나 우매하다면 그것을 배격하라.

  그러나 “진실하고 엄숙한 말”은 물리치지 말라.
나의 처음 계획은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에게만 몇 개의 평범한 생각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본 결과, 나는 “나 자신의 그릇에만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하였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향하여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어느 교파에 속하였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피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제외한다는
오해를 내가 받지 않기를 바란다.


 이 과제를 다룸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1.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2. 우리는 과연 그러한 사람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를 감독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능과 은총 면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재능에는 천부적 재능과 습득한 재능이 있다.

  목회자는 좋은 이해력, 분명한 해독력, 건전한 판단력 및 엄중한 사고력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목회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는 자기가 돌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을 이해하거나
혹은 무수한 고난과 위기를 넘어 그들이 다다라야 할 안식처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그가 대결할 수밖에 없는 수다한 적수들을 고려할 때 그것이 필연적이 아니겠는가?
바보가 하나님을 모르는 뭇사람들 및 모든 암흑의 영들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탄의 계교나 그 자식들의 교활함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영혼을 인도하려면 생동적이고도 민첩한 사고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꼭 필요할 때, “바보를 향하여 우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의 어디서나 멀쩡하게 생겼는데 머리가 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바보들을 상대해야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성(理性)을 활용하는 일곱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합리적 사고는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을 그렇게 다룰 수 없다.
그들은 설득당하는 것을 역 겨워 한다. 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는 건전한 이해력과 생동적인 사고의 순환위에 훌륭한 기억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 독서와 대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학습하여 진리에 대한 지식에 도달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억력에 불과하다.
이와는 반대로 “하늘나라에 대하여 학습 받은 서기관”은
곧 자기 일에 적합한 교사는 “자기의 보고(寶庫)에서 새로운 물건과 낡은 물건을 꺼내오는 주인과 같은 것이다.”

  목회자가 자신의 소명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갖지 못하면, 사역을 올바르게 행하기 어렵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직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거나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물러선다면 바람직하겠는가?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역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그는 그 일을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법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성서 전체에 대한 지식도 필수적이다.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고,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의미를 보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훌륭한 본문 연구자마다 훌륭한 성직자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훌륭한 본문 연구자가 아닌 사람은 훌륭한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좋은 본문 연구자가 되지 못하면, 반대자들의 진술을 교정하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
이 과업을 정확하게 수행하기 위해, 그는 본문의 낱말, 장, 절의 문자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본문의 영적 의미를 알기 위한 확고한 기반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각 본문에 대한 개념적이고 실제적인 추론을 통해, 제기되는 난제들을 해결하고
일어날 수 있는 반론에 응답하며, 이 모든 것을 청중들의 양심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원어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이 없을 경우, 그는 실천만을 취급하는 본문에 대해서조차 종종 속수무책이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본문에 대해서는 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이럴 경우, 그는 성서를 왜곡하는 지식인의 손에서 그것을 구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어에 관한 논의가 제기될 때 곧 바로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

  일반 역사, 고대의 관습, 연대 및 지리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성서를 철저하게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크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주석을 통해서는 이런 지식을 공급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학문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도 똑같이 유익하다.
비록 지금은 유행에 훨씬 뒤떨어졌다고 할지라도 어떤 학문(예술이든 과학이든)에 대한 지식은
성서 자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성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논리학을 가리킨다. 논리학은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고 진실하게 판단하며 확정적으로 사고하는 예술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든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든, 논리학은 학습과 가르침의 예술이다.
그렇다면 학문의 전체 분야에서 논리학과 비교하여 또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이다.
논리학만큼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학의 둘째 부분
즉 형이상학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크게 유익할 것이다.

  형이상학의 필요성은 최소한 두 가지이다.
일반적인 주제 아래 우리의 개념을 정리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해하기 까다롭지만
유용한 수많은 저자들을 해득하기 위해 목회자는 자연과학의 일반적인 근거에 대해서도 최소한도나마
익히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이것은 성서의 여러 구절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이것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불가시적 사실들이 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나타나고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준다”는 진리를
스스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적당한 기회에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오, 주님! 당신의 하신 일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 모든 것을 지혜로 만드셨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 과업을 심화시켜 나가기 어렵다.
기하학은 이해의 명확성을 위해 필요하고, 또한 명확하면서도 관련지어 생각하는 습관을 키우는데 유익하다.
이 방면의 지식 중에 어떤 것들은 그 밖의 것들처럼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모든 세대와 모든 국가들에서, 교회교부들이 능력은 있지만
그런 지식을 습득할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을 목회현장에 파송했던 것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가 있는데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 모든 지식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어떤 압박이 주어질 수  있을까?
만일 목회자가 능력이 있음에도, 평범한 이해력만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학문의 전당에서 수년을 보낸 자가 언어와 학문의 지식 위에
교부들에 관한 지식을 추가하지 못한다면 변명할 도리가 있겠는가?

  교부들은 성서의 원천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성서 전체를 영감 시킨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서 성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주석가들이다.
내가 특히 니케아회의 이전에 저술한 교부들에 대하여 언급하면 쉽게 주지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뒤를 따른 교부들과 친숙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테면 성 크리소스톰(St. Chrysostom), 바실(Basil), 제롬(Jerome), 오스틴(Austin),
그리고 특히 상한 마음의 소유자인 에프라임 싸이러스(Ephraim Syrus) 같은 교부들 말이다.
목회자에게 필수적인 지식의 분야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다.
이는 곧 사람들에 대한 지식, 즉 실제 생활에서 야기되는 그들의 처세법, 기질, 태도 등에 관한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목회자는 큰 손상을 입기 쉽고 선을 행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는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기만하려고 도사리고 있는 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다. 영들에 대한 분별은
세상에 대한 지식과 매우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실한 관찰에 의해 습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 영혼의 인도가 가능하겠는가?
그것이 없다면, 목회자는 단계마다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목회자가 상식을 지니지 아니하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상식이란 “이루어 질 수 있는 특수한 사물에 대한 정확한 고려”라 정의 할 수도 있고
 “사물의 상황에 대한 관습적 고려”(누가, 무엇, 어디서, 무슨 도움으로, 왜, 어떻게, 언제)와
다양한 여건에 우리의 행위를 적응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정의 되든, 용이 주도 하게 연구되고 진지하게 적용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그것이 현저하게 결여될 때 매우 큰 불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영적 분별력과 상식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양도 확실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평정과 예절을 잃지 말아야하고
여기에 (그는 “모두의 종”이므로) 학자의 정확성과 함께 신사의 모든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모형을 펠릭스(Felix)와 페스트스 (Festus), 그리고 아그리파(Agrippa) 왕 앞에서의 성 바울에게서 볼 수 있다.

 
  목회자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신사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의 선을 함양시키기 위해 그들을 만족시키는” 기술을 지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공적인 목회를 위해, 우리는 발음과 행동에 있어서, 강하고 분명한 음악적인 음성과 좋은 전달을 원하지 않는가?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보통 상상하는 것 보다는 훨씬 습득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현저하게 약하고 비 음율 적인 성대도 계속 사용하면 강하게 되고, 또한 듣기 부드러워진다.
거의 말 한마디마다 더듬는 사람들은 명확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발음이 거칠고 몸짓이 어색하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통해
행동의 어색함과 발음의 거칠음을 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두 면에서 탁월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 중에 많은 것들은 상당한 노력 없이 습득될 수 없지만
이 재능을 얻기 위해 투신한 자들에게 크게 격려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인간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그 분이 우리가 최선의 노력으로 경주할 때 지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라.
그 분처럼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가? 누가 그 분처럼 천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또한 그분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원하신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성령의 강력한 영향으로 우리의 이해를 개진하고 확대하며 우리의 모든 능력을 강화시키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의존하는 자들보다, 주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보다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제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다음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천부적이거나 습득된 모든 선물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비할 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그리스도의 종(그리스도의 목회자, a Minister of Christ)의  의도, 사랑 및 실천 전체를 생동시키고
또한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중요한 직능을 맡아 그것의 각 부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의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죽음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절대적으로 또한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다.
“만일 그의 눈이 순수하다면 그의 온 몸과 그의 온 영혼과 그의 온 역사는” 빛으로 가득찬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비칠 것이고, 당신의 길로 인도할 것이며
자기의 영혼의 진통을 보게 하며 만족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면, 만일 천박한 동기가 혼합되어 있다면
그의 “온 몸”과 그의 “온 영혼”은 밑 없는 땅에서 솟아오르는 “어두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하물며 이것들이 이 지고한 직능을 맡거나 수행하는데 주도적인 동기였거나 또한 동기라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그러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어떠한 축복도 받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마디의 저주가 그에게 임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마음속에 어떤 정착된 평화나 어떤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자기 수고의 열매 곧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일도 바랄 수 없다.
 “하나님의 신비의 청지기”곧 그리스도가 위해 죽으신 영혼들의 목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풍족하게 지녀야 한다.
그 사랑이 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일반 기독교인들의 그것을 훨씬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는 자기가 감수해야 할 고상한 성품과 그의 존재의 기반인 관계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사랑이 풍족하지 못할 때, 목회자는 자기의 직능을 성실하게 수행하는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모든 수고와 고난을 극복하기 어렵다. 만일 창조주께서 부모에게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열정적인 사랑, 곧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소르게, σοργη)을 주시지 않는다면, 부모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데
드는 고통과 피곤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어떤 이방인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이 없다면, 영적인 부모인
목회자가 많은 자녀들을 낳고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양육하는데 드는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측면에서 보든, 이 사랑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목회자는 이해력을 결핍한 사람이며
최고로 정신 나간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고
영혼구원에 대한 갈망도 느끼지 않음에도,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위해 죽은 자가 멸망하지 않도록 어떤 일이든지 감수하고
무엇이나 손해보고, 또한 어떤 고난도 극복할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이 일에
계속 머문다는 것이 나에게는 때로 이상하게 보인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 사랑의 차원은 세상에 대한 사랑 곧 돈이나 찬사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만이나 관능과 같은 가장 저차원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천박하고 저질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유치한 원리 곧 오락에 대한 사랑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비록 목회자나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유치한 일을 버려야”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쾌락에 대한 사랑과 영혼 속에 깊이 깔려있는 안일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실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불결한 자들에게 나의 율법을 전하느냐고 하신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목회자 곧 영혼의 목자이겠는가?
목회자가 주의와 성실로서 모든 악한 말과 행동, 모든 추한 외모, 더욱이 어떤 사람을 모욕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가장 무익한 일을 금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금할 것은 금해야 하고, 이로써 개인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양떼의 모범이라고 불려야 한다. 삶을 통하여 빛을 발할 때
우리는 성결하고 천성적인 성품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목회자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부단한 사랑의 일을 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을 도와줄 수 있고, 또한 감사와 자선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더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항상 겸손하고 신중하고, 부드럽고 온유하고 인내하며 절제할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상속자가 될”자들을 섬기는 수호천사와 유사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녀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고 그들에게 빛과 용기를 공급하며 알고 모르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그들을 인도하다가 작정된 시간에 자기에게 맡겨진 자들과 함께
하늘에 계신 자기 및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감히 자기의 지고한 직능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위대한 설계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자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인 그의 주님을 보라. 그는 그의 전능하신 역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갔으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주님께서 기쁨으로 추대하시는 종을 보라.
그는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새로운 영적 창조를 일으키는 말씀을 한다.
그는 주님께 힘입어 어둡고 공허한 자연을 향하여 “빛이 있으라”고 말하니 “빛이 생겼다.
낡은 것은 지나가고 만물이 새로워졌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들도 누려보지 못한 영예로운 사업 곧 “수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일에
인류의 구속자와 협동하는 사업에 계속적으로 고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이다. 따라서 모든 논쟁의 가능성을 초월하여 당신들과 나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어떠한가? 이것은 우울한 것이기는 하나 반드시 필요한 반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피력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이들은 존경할 정도로 잘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영국에서는 그들의 문제를 이렇게 구체화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그 일의 성격이 요청하는 대로 선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가?
혹은 불친절이나 감정적 불편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가? 이것은 비참한 두려움이다!
우리 형제들의 영혼을 위한 균형을 잡는데 있어서, 감정적 불편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혹은 그들이 자신들의 많고 큰 단점들을 의식하는데서 야기되는 수치감 때문인가?
그렇게 하면, 그 단점들을 경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을 근원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현명한 충고가 있다
 “그것이 너의 영혼에 관계될 때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하물며 무수한 영혼에 관계될 때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밖에 장애물은 없는가?
동정과 온유 때문에 우리는 현명한 고통을 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불필요한 고통을 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온유인가?
그것은 마치 의사가 자기 환자를 지나치게 동정한 나머지 수술을 하지 못하여 목숨을 잃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잔인한 동정이 아닌가! 나는 고통을 주어야 하겠다.
그래서 생명을 구해야 하겠다.
하나님이 치료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실을 밝혀 볼 것이다.

  우리는 천부적 재능에 대하여 민감한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여기에 민감하다면, 이교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거침돌들이 제거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편화된 무감각한 상상력의 가공스런 결과를 계속적으로 보고 있다
“아무 일에도 적당하지 않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대영제국이나 아일랜드를 위해 일할 기회가 없을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바보스럽고 우둔하고 완고한 목회자들이 생기고 있다. 그들은 생명도 정신도 사상도 없는 인간들이다
 이 결과 그들은 자신들과 만나는 주제넘은 바보들과 허풍선이 바람잡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기억력이 전혀 없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바람직한 지식인이 될 수 없고,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많은 사실에 대하여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붓고 있다. 하지만 깨진 그릇이란 물을 지탱할 수가 없지 않은가?
나는 플라톤처럼 “인간의 모든 지식은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억하지 않고는 작은 지식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기억력의 소유자일지라도 다음과 같이 불평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숙련은 더디 오고
                인생은 속히
                날아가니
   
                배우는 것은 그토록 적고
                잊는 것은
          그토록 많구나!
   
  우리는 목회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서 보다 큰 단점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무감각하고 이해력이 부족하고 그들의 능력은 천박하며 그들의 분별력은 희미하고 혼탁하다.
결국 그들은 전혀 사물에 대한 진정한 판단이나 사물을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다.
스스로 사물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들에게 여러 가지 책임을 하나님과 그들의 이웃과 그들 자신에 대한 의무를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들은 모든 오류의 미궁과 죄와 유혹의 물결을 뚫고 그들을 지도하겠는가?
들은 어떻게 사탄의 간계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을 세상의 모든 지혜에서 보호하겠는가?


  내가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그들은 시정될 수 없으므로) 부모들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멍청이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사람은 상인이 되거나 5만 내지 10만 파운드를 버는 일에는 유능할지 모른다.
그는 군인이 될 수 있고, (대가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옷 잘 입고 출세한 장교도 될 수 있다.
그는 수병이 되어 군함의 갑판 위에서 명성을 날릴 수도 있다.
그는 금마차를 탈 정도로 변호사나 의사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의 가정에 오점을 찍거나 교회에 치욕을 던지거나 복음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으려면
그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 그는 복음을 살해 할망정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학습된 재능에 대하여 민감한가? 이 문제는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과 함께 다음의 주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탁월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함이 있는지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이것을 알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확실히 어떤 사람은 결함이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나는 성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것이 그들의 여정에 빛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성서전체를 조망할 신앙의 유비에 대한 완전하고도 명백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신구약성서 전체에 대하여 익숙하게 알고 있는가? 어떤 본문이 언급될 때
나는 그것의 맥락(context)과 유사한 본문을 알고 있는가? 나는 최소한도 훌륭한 성직자
곧 훌륭한 본문주의자의 입장을 취하는가? 나는 4복음서, 사도행전 및 서신들의 문법구성을 아는가?

  따라서 나는 내가 읽는 것의 영적(동시에 문자적) 의미를 통달했는가?
나는 각 권의 전망과 각 부분의 경향을 이해하는가?
나는 각 본문에서 추론할 수 있는 자연적 결론을 잡아낼 기술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딘지 모르게 부패시키는
유대인들, 이신론자들, 가톨릭교인들, 아리우스주의자들, 소시니스주의자들 및 그 밖의 모든 분파주의자들이
그 결론들에 대하여 제기한 반대지론을 알고 있는가?
나는 그 반대지론 하나하나에 만족할 대답을 줄 준비도 되어 있는가?
따라서 나는 나의 청중의 다양한 입장이 요구하는 바에따라 성서의 모든 부분을 적용하도록 연구하였는가?
나는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해독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모든 목회자들처럼 그 언어로 기록된 책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반대자에 대하여 그것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어를 이해하거나 이해하는 척하는 자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들의 위선을 어떤 방법으로 논박할 수 있는가?
나는 구약성서의 언어를 전적으로 또한 비판적으로 이해하는가?
나는 다윗의 시편이나 창세기의 첫 장의 원어를 모국어로 옮겨 놓을 수 있는가?
나는 신약성서의 언어를 이해하는가?
나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통달한 자인가?
나는 그 언어의 실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으므로 누가복음 1장을 희랍어에서 모국어로 옮길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도대체 몇 해를 학교에서 보냈는가?
대학에서는 얼마를 지냈는가? 나는 그 긴 세월에 무엇을 하였는가?
나의 얼굴에 수치감이 뒤덮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짊어진 일의 성격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해 보았나?
그리스도의 대사 곧 하늘의 왕이 보낸 특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나는 “영혼을 보살핀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있는가?
나는 일반 역사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유대인과 기타 민족들의 고대관습에 친숙한가
 나는 최소한도 성서에 참고 되는 연대기에 대하여 손색없는 지식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적어도 (그 이상은 아닐지라도) 성서에 언급된 모든 장소에 대한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할 정도로 지리에 익숙한가?
여러 학문분야의 관문인 논리학을 터득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전보다 그것을 좀 더 이해하고, 항상 활용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가?
화법과 표상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그들의 야만적인 명칭을 비웃음으로 나의 무지를 은폐하려고 헛되이 노력하지 않는가?
나는 간접화법을 직접화법으로 환원시킬 수 있고, 가설적 삼단논법을 범주적 삼단논법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나는 태만으로 인하여 잔꾀를 지닌 신사들이 “논리학은 무익하다”고 하는 주장을 믿으려 들지 않는가?
최소한도 논리학의 유익은(그것이 이해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무엇이 초점이고 무엇이 아닌 것과, 어떤 문제를 증명하기란 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이해하는가?
학자들의 깊이와 스코투스(Scotus)와 아퀴나스(Aquinas)의 정묘함은 그만두고라도
그 유용한 학문의 기초, 곧 일반원리는 알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어느 정도 정복하여 나의 이해를 선명하게하고 나의 개념들을 적절한 주제 아래 정리할 수 있으며
헨리 모어(Henry More)박사의 저서와 메일부랜취(Malebranche)의 “진리의 탐구” 및
클락(Clarke)박사의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명”을 수월하게 즐겨 읽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자연과학을 이해하는가?
비록 깊이 파고들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그것의 원리만이라도 소화시켰는가?
나는 그레이보잔드(Gravesande)과 케일(Keil)의 원리론 및
아이작 뉴우톤경(Sir Isaac Newton)의 “광색론(光色論)”과 그의 원리론(Principia)을 통달하였는가?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나는 수학적 지식을 어느 정도 축적하였는가?
나는 유클리드(Euclid)의 원소의 수학적 기초를 통달하였는가?
만일 그 정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면, 아직도 풋내기에 불과하다면
나는 학교에서 나온 후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교부들 곧 교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존경하는 인물들과 친숙한가?
나는 클레멘트(Clement), 로마누스(Romanus), 익냐시우스(Ignatius) 및 폴리캅(Policap)의 황금 같은 저서를 반복해서 읽었는가?
나는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터틀리안(Tertullian), 오리진(Origen)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anus) 및 싸이푸리안(Cyprian)의 저서들을 최소한도 한번 읽어 보았는가?
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인간들(저서들도)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들의 기질, 처세법 및 관습에 대하여 관찰해 보았는가?
나는 인간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비둘기의 순결성 위에 뱀의 지혜를 첨가하는 법을 배웠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분별력을 주셨거나
나의 노력으로 습득함으로써 어느 경우에 처하든지 모든 상황을 분별하게 하고
또한 다양한 복합적 상황에 따라 나의 행위를 적응시키고 변화할 수 있는가?
나는 조잡하거나 추태를 부리지 않으며, 교양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가?
나는 구변이 뛰어나고 행위가 정중한 사람들을 닮으려고 심혈을 기울이는가?
나는(말과 행동에 있어서 경박하거나 야박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정중한가?
따라서 나는 내가 대화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열을 안겨 주고”
 “그들의 교양에 도움이 될” 나의 능력과 수단을 견지하고 있는가?
만일 내가 이렇듯 최저의 능력마저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로 인해 자주 후회하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얼마나 실망하고 기대 이하의 쓸모없는 인간이 되겠는가?
만일 내가 고대의 혜성들 곧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과 친숙할 기회를 낭비해 버리고 말았다면
또는 만일 내가 학문들을 이해할 귀중한 시간들을 무위로 흘려보냈다면
능력을 발휘해야 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되겠는가!
만일 내가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통달해야 할 시간을 허비하였다면
나의 입장은 더 악화될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이 성스러운 지식의 보고에 매우 친숙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의 눈에 가려져 있고 완전히 닫혀 있으며
나에게는 그것을 열만한 열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참혹한 결함을 메우기 위하여 가장 정확한 모국어 성서(지금 그것이 공급되고 있으니 만큼)의 지식을
성실하게 활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가지고 밤낮으로 숙고하는가?
나는 “내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울 때와 일어날 때” 그것에 대하여
생각(따라서 결과적으로 말)하는가?
이런 방법을 통하여 나는 결국 성서의 본문과 함께 그것의 문자적 및 영적 의미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습득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성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 없이 나는 실로 눈먼 인도자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나의 양떼에게 절대적으로 가르칠 수 없으며
또한 내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 것같이,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없다.


  이런 재능들보다, 혹은 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외면적 및 지성적 재능은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마땅히 취할 태도를 취하는가?
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것에 대하여 바로 판단하도록 도우시는가?
내가 이 직능과 목회를 수행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내가 담임 목회자나 부목사로서 이 교구를 담당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 전적으로 일삼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안목은 처음부터 이 사실에만 고정되어 있는가?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나의 의도 속에 어떤 혼합물 곧 열등한 금속의 합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세상적 유익 곧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추악한 탐욕”을 예나 지금이나 지니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세속적인 견해 곧 명예나 승진, 많은 수입 또는
최소한도 웬만한 재산, 흔흔하고 안락한 생활 등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가?
가엾도다! 나의 형제여!
 “당신 속에 있는 것이 어두움이라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당신들이 목회에 발을 들여놓는 동기가 안락한 생활이었는가?
그래서 당신들은 대낮에도 아무런 부끄러운 기색 없이 이 사실을 공공연히 말하는가?
나도 당신들을 시몬 마구스(Simon Magus)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들이 그보다 여러 점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 곧 성령의 능력을 위해 돈을 지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돈보다 그 선물에 보다 큰 가치를 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그 선물보다는 오히려 돈에 대하여 훨씬 높은 가치를 둔다.
따라서 돈이 수반되지 않는 한 당신들은 그 선물을 원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감독은 말하기를 안수를 받은 다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고 당신들은 승진의 수단인 돈을 받는다.
당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면서, 그것들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에게 성령을 나누어준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당신의 손을 통해서도 역시 “성령이 지금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또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할 때 당신들의 입이나 손을 통하여 목회를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오, 시몬, 시몬! 지금 기독교 세계 안에서 가장 존경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여
당신은 얼마나 성자다운가! 어느 누구도 무지나 고의로 인하여 나를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옥수수를 잘라 먹는 소에게 재갈을 물리고”싶지 않다. 나는 영적 “노동”도 “보상받을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양떼 속에 “영적인 것을 심을 때”
우리가 “그들에게서 사례비 받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따름이다.
비난 받을 대상은 성직에 몸을 담을 때, 물질을 동기나 또는 동기의 일부로 삼는 것이다.”

          Hic nigrae succus loliginis, haec est Aerugo mera.
          (이것은 호레이스에게서 취한 인용구로서 보스카웬은 다음과 같이 번역 하였다.
          “이것은 가장 새까만 독즙(毒汁) 이다.” - 편집자)
 
  만일 승진이나 명예나 이익이 목회자의 눈을 뒤덮었다면, 그의 눈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 주님은 단순한 눈과 단순하지 않은 눈 사이에 중간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단순하지 않은 눈은 악이다. 그것은 명약관화하고 판결난 사건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자신의 직능을 수행할 때
순수하게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도를 지닌 자의 눈은 단순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악하고, 따라서 그의 “온 몸은 어두움으로 가득 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빛은 어두움” 그 자체이고 어두움이 그의 온 영혼을 둘러싼다.
그에게는 확고부동한 평화가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없으며, 또한 자기 노동의 결실도 없다.


  이것이 해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례비에 사례비를 더하고
또 그렇게 하면서도, 입을 닦으며 자기들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똑 같은 늪에서 헤매다가, 종당에는 그들의 발이 “어두운 산악지대에 부딪치게 된다.”
사실상 “적은 수입으로 대가족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호소가 들린다.


  그러나 지탱하라! 어떻게? 그 돈으로는 가족들을 “고운 자줏빛 아마포로” 입히지도 못하고
“날마다 사치하게” 먹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수입이 당신과 가족에게 일상 필수품과 생활의 편이를 제공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목회자가 되게 하는 검약하는 기독교적 단순성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주지 않겠는가?
그것은 당신들로 하여금 화려하고 멋지게 또는 우아한 사치와 유행적인 관능으로 만족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좋은 것이다. 수입이 얼마든지 간에, 당신들의 눈이 열린다면, 지옥 불에서 도망가듯이 이런 것에서 도피할 것이다.

“나는 보다 많은 수입으로 인해서 보다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단지 이 목적 때문에 보다 많은 수입을 추구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단언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게 되며 당신의 눈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변명이나 도피를 일삼지 말라. 이것은 당신들의 행위의 동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에 대해 더욱 많은 선을 행하려는 욕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당신들은 그렇지 않음을 안다. 당신들의 양심은 천명의 증인과 같다.).
오히려 이렇게 추구하도록 당신들을 활성화시킨 것은 “돈에 대한 사랑”과 “다른 물질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당신들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고
그것이 당신들의 영혼을 채우고 뒤덮고 있다.


  나는 보다 많은 수입이 필연적으로 더욱 많은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부언하고 싶다.
영적인 선은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불쌍한 “자들을 불구덩이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한 선이다.
당신들은 특히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고 이것을 위해 “당신의 모든 학문과 노력을 경주하기로” 엄숙히 서약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들의 첫 양떼를 위하여, 모든 시간과 모든 힘을 바치는 것보다, 당신들의 생명을 바칠 때
영혼 구원을 위해 더욱 많은 선을 베풀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돈이 많다면, 나는 세상적인 선을 더 많이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것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 한다.
 “만일 부가 증대되면, 그것은 그 자체를 삼켜버린다.” 아마 당신의 수입에 비례해서 당신의 지출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들이 보다 큰 능력의 소유자라면
당신은 선을 행하기 위하여 보다 큰 의지를 보이겠는가?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믿을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이 더 큰 권력을 지녔을 때, 오히려 더 작은 의지를 품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이제 그들이 많은 돈을 가질수록 그것을 더 사랑하고, 그들이 가진 것이 없을 때
 “보잘 것 없는 것마저도 기꺼이 주는 미덕”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가진 것이 많으므로 “많은 것을 주기는” 고사하고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입을 증가시킴으로 생활비를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물을 돕겠다”고 한다.
나의 대답은 아래와 같다.
이것이 당신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려는 유일한 동기였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위의 호소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당신의 눈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은 그것에 대하여 논의도 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의 의도의 순수성을 즉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유능한 인물을 당신들의 교구의 부목사로 삼으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둘이나 그 이상의 양떼를 맡으면서도 그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은 무엇이라고 호소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수일간 자기의 양떼를 간간이 바라만 보다가 편리한 거리(距離)로 옮겨가서
 “영혼아, 너는 수년간 많은 선행을 쌓았으니 이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말한다.
수년전에 나는 어떤 평범한 사람에게 “양떼를 치는 사람은 양의 젖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친구여, 나는 그것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소. 그러나 양을 치지 않는 자는 어떻게 하겠소?
그는 멀리 서서 자기 혼자만 먹고 있소. 양떼를 치는 자는 다른 사람이요. 그런데도 그가 양의 젖을 먹어야 할까요?
당신은 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사실상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위대한 목자께서 오셔서 이 무익한 종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밖의 어두움 속으로 던지라”고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때
그는 자기변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그것은 올바른 동기가 우선적이며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결핍은 어느 무엇으로도 보충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사리를 바로 설정하지 않는 한, 과오는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눈, 곧 순수한 동기를 아무리 강조할지라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이렇듯 순수한 동기가 없을 때, 우리의 모든 희생, 기도, 설교, 성례는 주님에게 역겨운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중요한 논문을 끝맺을 수 없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는 분께 맡기겠다.
당신들은 얼마동안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런데 이제 당신들은 다른 교회로 옮기려고 한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지금 섬기는 교회보다 다른 교회에 관심을 두려는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50파운드 밖에 받지 못하였으나 이제부터는 100파운드를 받아야 하겠다.”
이것이 당신들의 행동의 진정한 동기이고, 이동하려는 실제적 이유인가?
 “그렇다.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아닌가?”
이방인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는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이 보다 더 큰 부심(浮心)은 이 세상에 아직 알려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사 곧 불멸하는 영의 목자,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보초,
 “천사들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신비의 관리자로 임명된 자가 저기에 간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런던으로, 브리스톨로, 노드앰톤으로” 왜 그는 거기로 가는 것인가? “돈을 더 벌려고.
” 황소의 떼를 시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이유가 된다.
가령 몰이꾼은 어떤 생각 없이 이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이교도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당신들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신 불멸의 영혼들을 떠나는 이유가 정당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비밀리에 영향을 끼치는 동기일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아무 수치심도 없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양해되고 정당화되며 방어되는 실정이다.


  이렇게 경건도 수치도 모르는 사람들은 소수자로서 여기 저기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견상 종교적 인간들로서 영국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상당히 많다!


  나는 사랑에 관하여 나의 당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책임지려고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받아 사람들을 위해 안수 받았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데
이것은 나의 창조주와 나의 동료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관계를 맺고 계신 위대한 중보자의 권위에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나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과 나의 형제들을 위해 바쳤는가?
나는 나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나의 이웃인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가?
이러한 사랑이 나를 삼켜 버리고, 나의 전체를 장악하며, 나의 지고한 행복을 이룩하는가?
그것이 나의 모든 열정과 기질을 생동화하고 나의 모든 능력과 기능을 조절하는가?
그것은 나의 모든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며, 나의 모든 언행을 통제하는가?
만일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는 최소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심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갈구를
절감함으로써 제 아무리 나의 자연적 성향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실천하고,
나에게 합당한 것이라도 결별하며,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이라도 감수하여,
하나의 영혼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나의 지배적인 기질인가?
그것은 나의 모든 수고를 가볍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얼마나 피곤한 것인가! 얼마나 고역인가!
나는 호미를 드는 편이 훨씬 좋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만일 내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한다면 이것이 나의 지배적 기질이 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내가 돈과 향락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내 안에 있지 않다.
내가 명예와 찬사를 좋아하거나 옷과 좋은 음식을 즐겨도 그 사랑이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태만이나 안일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다.
도대체 탐욕적이고 거만하고 사치스럽고 게으르며 향락 추구적인 목사란 어떤 피조물인가!
이런 것들이 있는 곳에 불신앙이 점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스러운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 상태를 그들의 직업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호칭되는 고귀한 명칭을 모독하는 일이 이상한가?
“모독을 듣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 그런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겠다.”
이제 이런 사람은 계속 절름거리면서 걷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 속에 던져지는 것” 이 좋을 것이다.


  비교적 건전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자처하는 당신들이 생각할 것은
곧 나는 나의 실천에 관하여 당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사생활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가?
나는 이 한 가지 사실 곧 모든 점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행하는가?
나는 모든 악한 언행과 모든 악한 외모와 약자의 길에 걸림돌을 놓을지도 모를 모든 무관심한 것을 단호하게 금하는가?
나는 선행에 열심인가?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종류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가?
나는 소명을 받은 공적인 사역 곧 나의 목회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나는 “말과 행동과 사랑과 영과 신앙과 순결에 있어서” 나의 “양떼에게 모범”이 되는가?
나의 “말” 곧 나의 일상 대화는 “항상 은총 안에” 있으며 항상 “청중들에게 은총을 전달하기에 충분한가?”
나의 행위는 나의 소명의 품위에 적합한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가는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나의 마음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나의 대화 전체를 통하여 반영되고 있는가?
나의 언행에 나타나는 정신과 기질은
나로 하여금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과 같이 당신들도 나의 추종자가 되라”고 겸허한 담대성으로 말할 수 있게 하는가? 영적 지각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내가 지금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는 것과
 “나는 세상에서 단순성과 거룩한 성실성으로 대한다”(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판단한다)고 인식 되어 있는가?

 
  나는 모든 세상적 욕망과 모든 사악하고 무모한 애착에 대하여 모범이 될 정도로 순결한가?
나의 삶은 하나의 지속적인 사랑의 노고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돕는 발자취인가?
나는 모든 것에서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는가?
따라서 “나는 얼굴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가?”


  형제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더욱이 그리스도의 목회자들로서 우리의 소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결여하고도 만족하는가?
우리에게는 소명과 영원히 동떨어진 곳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성이 있는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목회할 권위를 주신 그분이 아니다.
그의 뜻은 그의 처음 대사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의 사랑과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당신들은 1700년 전에 빛을 발했던 그들처럼 “불타고 광채 나는 빛”이 될 수 없겠는가?
당신들은 그 불타는 사랑과 빛나는 성결에 참여하기를 원하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당신들은 그것이 어떤 인간에게도 부여될 수 있는 위대한 축복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그것을 설계하고 목적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이 "푯대를 향하여 경주하는가?" 당신들은 이것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살아계시므로 당신들은 그것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만 계속 기도하면서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질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기로 하자.”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모든 의식을 지키되
특히 그의 말씀인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우리와 우리의 양떼의 “위대하신 목자께서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행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그를 기쁘시게하는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는 것을 명상의 제목으로 삼기로 하자.

  이것이 같은 주님 안에서 당신들의 형제이며 종인 나의 염원이요 기도인 것이다.

1756년 2월 6일 런던에서

존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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